[취재수첩] 퀄컴과 수직적 진보
[디지털데일리 이수환기자] 퀄컴은 스마트 기기의 두뇌로 불리는 애플리케이션 프로세서(AP)를 잘 만든다. 성능뿐 아니라 기능에서도 평균 이상의 실력을 보인다. 다른 업체가 AP에 모뎀을 접목시키지 못하고 있을 때 이 두 가지를 하나로 합친 시스템온칩(SoC)을 내세워 성공을 거뒀다.
사람에 비유하면 우등생이다. 국어부터 수학, 과학, 영어, 체육에 이르기까지 골고루 성적이 좋다. 그래서인지 시장조사업체 IHS에 따르면 올해 2분기 글로벌 애플리케이션 프로세서(AP) 시장에서 퀄컴은 38.9%의 점유율로 압도적인 1위를 달리고 있다. 그나마 작년에 비해 시장점유율이 떨어진 게 이 정도다.
당연하지만 퀄컴이 AP에서 이만한 성적을 올린 것은 그만한 노력이 뒷받침됐기 때문이다. AP뿐 아니라 웬만한 저전력 반도체에 대중적으로 쓰이는 ARM 아키텍처만 하더라도 퀄컴은 오래전부터 자체 설계자산(IP)을 적용했다. ARM 아키텍처 라이선스는 크게 두 가지로, 하나는 ARM이 제공하는 설계를 그대로 사용해야 하고 다른 하나는 스스로 IP 재설계를 시도하는 방법이 있다. IP 재설계를 시도할 경우 기본적인 ARM 아키텍처보다 더 높은 성능을 기대할 수 있지만 문제는 만만치 않은 라이선스 비용과 함께 개발이 상당히 어렵다. 업계에서 IP 재설계가 ‘성공하면 대박, 실패하면 쪽박’이라는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니다.
SoC의 IP 재설계는 사실상 상향평준화가 이뤄진 AP 업계에서 최후의 선택지다. ARM은 인정하기 싫겠지만 큰 코어 4개, 작은 코어 4개를 더한 ‘빅리틀’ 아키텍처가 이론적으론 우수하지만 실제로는 효율이 만족할만하지 못하다는 점만 봐도 그렇다. 많은 업체가 ARM A53 아키텍처를 선호하는 것도 개발이나 단가에서 유리해서다. 특별히 성능이 높아서가 아니다. 그래서 조만간 시중에 선보일 스냅드래곤 820을 보면 퀄컴이 향후 AP 시장에서 어떤 대응 전략을 내세울지 엿볼 수 있다.
스냅드래곤 820은 이전 스냅드래곤 810에서 불과 숫자 10이 달라졌을 뿐이지만 바닥부터 완전히 뒤집은 제품이다. 세세한 사양보다 가장 눈여겨볼 부분은 ‘크라이요’처럼 빅리틀이 아닌 단일 아키텍처로 돌아섰다는 사실이다. 마치 이전까지 써오던 ‘크레이트’ 아키텍처와 마찬가지다. 이는 초심으로 돌아가겠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사실 SoC의 성능을 결정짓는 것은 쿼드코어(4개)나 옥타코어(8개), 혹은 데카코어(10개)와 같은 중앙처리장치(CPU) 코어 숫자가 아니다. 삼성전자, 미디어텍, 화웨이(하이실리콘)과 같은 후발 업체가 빠르게 치고 올라왔고 ARM이나 이미지네이션에 비해 열세인 그래픽처리장치(GPU)로 인해 퀄컴 내부적으로 재정비에 시간이 좀 걸렸다고 봐야 한다. 따지고 보면 CPU, GPU, 모뎀에 이르기까지 IP 재설계를 적용하는 업체는 퀄컴 이외에 찾아보기 어렵다.
돌아와서 퀄컴이 이 정도의 역량을 갖추기까지 얼마나 혹독한 노력을 했는지는 부정할 이유가 없다. 그럼에도 특허권 남용, 반(反)독점과 같은 일련의 논란이 퀄컴 혁신의 결과물을 폄훼하는데 쓰이는 것은 억울한 일이다. 놀랍게도 자유시장경제체에서의 독점이란 혁신의 연속성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페이팔 창업자인 피터 틸은 진보를 ‘수직’과 ‘수평’으로 나누고 수직적 진보를 통한 혁신을 가속화한다고 주장한다. 맞는 말이다. 남들이 선풍기 크기를 키우고 날개를 늘릴 때 에어컨을 내놓고 시장을 혁신해야 한다는 얘기다. 퀄컴도 마찬가지다. 예컨대 정부로부터 허가받지 않아도 되는 무선랜 주파수를 롱텀에볼루션(LTE)과 결합, 보다 경제적이면서도 더 빠르게 통신이 가능한 LTE-U(Unlicensed)를 발 빠르게 준비한 상태다. 이 기술은 스냅드래곤 820에도 적용됐다.
앞서 언급했지만 AP 시장이 상향평준화되면서 퀄컴의 시장점유율이 다소 떨어지는 것은 사실이다. 다른 업체가 수평적 진보를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퀄컴이 여전히 높은 영향력을 유지하고 있는 것은 단순히 시장점유율이 높아서가 아니라 그만한 역량을 갖추고 있어서다. 제품을 만들 때 수많은 의사결정 과정을 거치기 마련이고 퀄컴 제품을 무조건 써야할 이유도 없다. 그저 제품이 좋아서, 가격이 만족스러워서, 호환성이나 개발 편의성이 높아서 선택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스냅드래곤 820이 어떤 결과를 만들어낼지는 여전히 미지수다. 성능에서 최고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모든 면에서, 어쩌면 기업과 사용자를 모두 만족시킬 수 있는 AP가 될 가능성이 충분하다. 퀄컴이 여전히 수직적 진보를 거듭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했다는 점에서 절반 이상의 성공을 확신한다.
<이수환 기자>shulee@ddail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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