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이나 리스크에 노출된 한국 반도체 산업
* 7월 25일 발행된 <인사이트세미콘> 오프라인 매거진 8월호에 실린 기사입니다.
중국 정부가 반도체 투자 기금을 조성한 이후 현지 자본이나 기업이 해외 업체를 M&A하는 사례가 늘어나고 있다. 메모리에 치중돼 있는 한국과 달리 중국은 설계, 파운드리 전공정 및 후공정 등 전체 반도체 생태계에서 경쟁력을 차근차근 쌓아가는 중이어서 10년 후에는 한국을 앞서는 반도체 산업 국가가 돼 있을지도 모른다. 특히 중국은 한국의 주력 수출 품목인 메모리 반도체 시장으로도 진입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어 국내 정부 및 산업계 관계자들이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글 한주엽 기자 powerusr@insightsemicon.com
중국은 모든 전자 산업에서 한국을 뒤쫓고 있다. 중국 기업들은 거대 자국 시장과 정부의 지원을 등에 업고 무서운 속도로 성장하고 있다. 일부 부품 산업의 경우 생산량 측면에서 이미 중국이 우위를 차지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발광다이오드(LED)와 태양광 분야가 대표적이다. LED의 경우 중국 기업들의 생산량이 한국을 뛰어넘었으며 태양광 역시 폴리실리콘, 웨이퍼, 셀, 모듈 등 전 영역에서 중국 업체들이 우위를 점하고 있다. 디스플레이는 내년 혹은 내후년이면 생산량 측면에서 중국이 한국을 앞지를 것으로 보인다. 유일하게 격차가 나는 산업 분야는 반도체다. 그러나 반도체 산업도 자세히 뜯어보면 팹리스 분야에선 중국이 한국보다 우위를 차지하고 있다. 앞으로 격차는 더 커질 것으로 보인다. 현재 중국이 유일하게 발을 담그지 못한 분야는 바로 메모리 반도체인데, 최근 들어서는 중국이 이 분야로도 진출을 꾀하고자 하는 움직임이 이곳저곳에서 포착되고 있다. 메모리 반도체는 한국의 주력 수출 상품으로 중국이 들어올 경우 장기적으로 적지 않은 타격을 입을 것으로 업계에선 예상하고 있다.
중국, 반도체 수입액이 석유보다 많아
중국은 이미 수년 전부터 북미를 누르고 세계 최대의 소비 시장으로 부상했다. 화웨이, 레노버, ZTE, TCL 등 자국 시장을 발판으로 삼고 성장한 중국 IT 기업들은 최근 세계 시장에서 성장세를 이어나가고 있다. 이 같은 상황은 중국의 대외 수출입 실적에서도 잘 나타난다. 2013년 중국의 IT 관련 제품의 수출입 총액은 1조1494억달러로 2000년 대비 무려 11배나 성장했다. 이 가운데 수출은 6641억달러로 중국의 수출 총액 가운데 30%를 차지한다. 수입의 경우 4853달러로 중국 수입총액의 24.9%를 차지했다.
IT를 포함한 전자제품의 ‘쌀’이라고 불리는 반도체 수입량 역시 급증세다. 2007년 1294억달러였던 중국 반도체 수입액은 2013년 2319억달러(약 271조원)로 2배 가까이 증가했다. 2319억달러는 중국 내 석유 수입액을 소폭 상회하는 수치다. 중국의 반도체 수입액은 2014년에도 2000억달러를 상회한 2076억달러를 기록했다.
아직 반도체 분야에서 중국 기업들의 위상은 높지 않다. 2012년 중국 반도체 기업 톱10의 매출액 합계는 약 36억3000만달러로 세계 1위 반도체 업체인 인텔(2012년 매출 533억달러)의 10분의 1도 안 된다. 이렇다보니 자급률도 낮을 수 밖에 없다. 중국반도체산업협회에 따르면 중국 내 반도체 자급률은 현재 20% 수준으로 낮다. 중국 전자 전문 매체인 전자매니아(电子发烧友)는 중국 반도체 산업의 현 위치를 소개하며 “중국 반도체 기업은 소규모인데다 약하다”며 “전 업계 통틀어 연구개발(R&D)에 대한 투자는 미국의 인텔 한 기업을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고 평가했다. 중국 정부가 반도체 산업 육성에 팔을 걷어붙인 이유는 이 같은 대외 반도체 무역 의존도를 낮추고 자국 업체들의 경쟁력 향상을 도모하기 위함이다.
중국의 반도체 산업 육성 정책, M&A 독려
2000년 중국은 ‘소프트웨어 산업과 집적회로산업 발전을 장려하는 정책(鼓勵軟件産業和集成電路産業發展的若干政策)’을 발표하고 해외 기업이 중국에 공장을 짓도록 유도했다. 투자액이 80억위안을 초과하거나 0.25마이크로미터(㎛) 이하의 제품을 생산하는 기업에게는 세금을 감면해줬고, 장비 수입관세와 수입 과정에서 발생하는 부가가치세도 면제해줬다. 그러나 이 같은 정책은 효과를 보지 못했다. 당시만 하더라도 중국은 인건비가 저렴한 ‘세계의 공장’ 정도로만 여겨졌기 때문에 첨단 기술을 가진 해외 기업들은 중국에 공장을 짓지 않았다. 해외 기업을 자국으로 끌어들이는 데 실패한 중국은 최근 들어 자국 기업을 적극 육성하는 쪽으로 정책 방향을 틀게 된다.
작년 6월 중국 국무원이 발표한 ‘중국 IC 산업발전추진 가이드라인(國家集成電路産業發展推進綱要)’에는 중국이 반도체 산업을 어떻게, 얼마만큼 발전시킬 것인가가 잘 나타나있다. 이 가이드라인에 따르면 올해 중국 반도체 매출은 작년 대비 40% 증가한 3500위안(약 61조원)으로 예상됐다. 2020년까지 연평균성장률 20%를 달성하는 것이 목표다. 아울러 2030년까지 중국 반도체 기업을 세계 톱 클래스로 육성하겠다는 것이 이 가이드라인의 주된 내용이다.
이 가이드라인이 그간의 반도체 산업 육성 정책과 다른 점이라면 ‘돈 보따리를 확실하게 풀었다’는 것이다. 중국 공업정보화부(工業和信息化部, 공신부)는 작년 10월 14일 공식 웨이보를 통해 ‘중국국가집적회로산업투자기금(國家集成電路産業投資基金)’이 설립됐음을 알렸다. 이 기금은 중국 IC 업체들의 인수합병(M&A)을 돕는데 사용될 예정이다. 1차 기금 규모는 1200억위안(약 23조원)에 달한다. 1차 기금 설립에 참여한 곳은 중국 국가개발은행 산하의 금융사, 중국 담배총회사, 차이나모바일, 중국전자과학기술 그룹 등 중국 내 대형 국유기업들이다. ‘1차’라는 단어에서 알 수 있듯 이 기금 규모는 앞으로 확대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 중국 현지 매체인 21세기경제보도(21世紀經濟報道)에 따르면 중앙정부가 기금을 설립한 후 베이징과 상하이, 텐진, 샤먼, 허페이, 청두, 시안, 항저우 등의 지방 정부도 적극적으로 기금 설립에 나서고 있다. 양쉐산(楊學山) 중국 공신부 부부장(副部長, 차관급)은 “기금은 주로 반도체 제조분야에 사용될 예정”이라며 “설계, 테스트 및 패키징, 장비, 원재료 분야에도 일부 사용될 것”이라고 말했다.
중국 정부가 반도체 투자 기금을 만든 이후 현지 자본과 기업은 최근 해외 반도체 업체를 연이어 인수하고 있다. 정부가 제시한 전략 방향에 맞춰 착실히 실행에 옮기고 있는 것이다.
작년 8월 베이징 후아 캐피탈은 이미지센서 기업인 미국 옴니비젼을 19억달러에 인수했다. 올해 1월에는 파운드리 업체인 SMIC, 후공정 업체인 JCET가 중국 정부의 반도체 펀드를 활용해 싱가포르 스태츠칩팩의 지분 100%를 사들였다. 스태츠칩팩의 인수로 반도체 후공정 업계에서 JCET의 지위는 ASE, 앰코에 이어 3위로 올라가게 됐다. 3월에는 상하이 지역 펀드인 서밋뷰 캐피탈 등이 컨소시엄을 구성해 미국 특수 D램 설계 업체인 ISSI를 6억4000만달러에 인수했다. 4월에는 동심반도체유한공사가 한국의 D램 설계 업체인 피델릭스의 지분을 사들여 최대주주가 됐다.
D램 생산을 포기하고 파운드리 업체로 전향한 대만 파워칩은 중국 허페이시에 300mm 반도체 웨이퍼 공장을 세우고 현지에 공장을 둔 BOE의 디스플레이구동드라이버IC를 만들기로 했다. 투자금액 135억위안(약 2조5000억원)은 모두 허페이시가 댄다. 업계 전문가들은 이번 합작을 사실상 ‘기술력 판매 거래’ 성격으로 보고 있다. 파워칩은 기술을 제공하고 허페이시는 자금을 대는 것인데, 장기적으로 볼 때 파워칩은 기술만 뺏기고 퇴출될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전문가들은 예상한다.
중국의 반도체 투자기금은 M&A 용도로 활용
메모리 반도체 분야의 M&A도 적극 추진하고 있다. 7월 13일 미국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중국 최대 팹리스 반도체 업체인 칭화유니그룹이 미국 메모리 반도체 업체인 마이크론의 인수를 타진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WSJ는 칭화유니그룹이 마이크론의 주식 한 주당 21달러 제시했다고 전했다. 이는 13일 마이크론의 종가(17.61달러) 대비 19.3%의 프리미엄을 얹은 것이다. 총 제시 인수 금액은 230억달러(한화 약 26조원)다. 2013년 일본 D램 업체 엘피다를 인수한 마이크론은 메모리 반도체 업계 3위로 껑충 뛰어올랐지만 최근 PC D램 가격 하락세로 주가는 급락 중이다. 지난해 연말 마이크론의 주가는 35.01달러였다. 칭화유니그룹의 자오웨이궈 회장은 이날 블룸버그와의 전화 인터뷰에서 “마이크론과의 협력에 관심이 많다”고 말해 인수설에 무게를 실어줬다.
1988년 설립된 칭화유니그룹은 칭화대학이 설립한 칭화홀딩스의 자회사로, 중국의 국영 기업이다. 칭화유니그룹은 2013년 시스템반도체 팹리스 업체인 스프레드트럼 커뮤니케이션과 RDA마이크로일렉트로닉스를 인수하며 중국 최대 칩 설계 회사로 발돋움했다. 작년 9월 인텔은 칭화유니그룹에 15억달러를 출자하고 지분 20%를 취득한 바 있다. 지난 2월에는 10억위안을 투자해 TCL의 스마트폰 사업을 M&A했다. 4월에는 션양기계(沈机床)에 30억위안을 투자해 2대 주주가 됐다. 칭화유니그룹의 션양기계 투자는 이 회사가 스마트폰 제조 분야로 영역을 넓히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5월 말 이 회사는 휴렛팩커드(HP)의 중국 서버, 네트워킹 사업 부문도 인수했다.
중국전자보(中国电子报)는 칭화유니그룹에 대해 ‘중국의 삼성’을 지향하는 회사라고 소개했다. 중국 경제학자 지아후췐(家胡权)은 “이 같은 지향점은 중국 정부의 바람에도 부합하는 일”이라고 말했다. 물론, 칭화유니그룹의 마이크론 인수는 ‘쉽지 않다’고 보는 시각이 우세하다. 인수를 위해 제시한 가격이 낮은 것은 논외로 치더라도, 미국 정부가 이를 허락하지 않을 것이라는 견해가 많기 때문이다.
WSJ의 이번 보도로 확실해진 건 ‘중국이 메모리 반도체에도 큰 관심을 갖고 있다’는 점이다. 실제 중국 내 언론들은 정부 주도로 메모리 반도체 업체가 세워질 것이며, 초기 대표이사직은 현 SMIC의 최고운영책임자(COO)인 자오하이쥔(Haijun Zhao)이 맡게 될 것이라는 비교적 구체적인 소문도 전하고 있다.
업계의 한 관계자는 “중국이 메모리 산업에 뛰어들면 한국 내 메모리 관련 인력을 적극적으로 스카웃할 것”이라며 “디스플레이 분야의 사례를 봤을 때 국내 전문가들이 중국으로 빠져나가는 것을 막을 방법은 사실상 없다”고 말했다. 이미 팹리스로 대표되는 시스템반도체 분야에선 중국이 한국을 앞서 있다. 시장조사업체 IHS에 따르면 지난해 중국 내 팹리스 반도체 업계의 총 매출액 규모는 80억1700만달러로 한국(13억9900만달러)보다 5배 이상 컸다.
순수 파운드리 분야 역시 중국이 한국보다 강하다는 견해가 많다. 중국 대표 파운드리 업체인 SMIC는 최근 화웨이, 퀄컴, 벨기에 반도체 연구기관인 IMEC와 중국 상하이에 ‘SMIC 어드밴스드 테크놀로지 R&D 센터’를 조인트벤처 형태로 설립키로 했다. 이들은 이 R&D 센터에서 14나노 공정 기술을 개발한 뒤 SMIC의 생산 라인에 해당 공정을 도입할 계획이다. SMIC 등은 정확한 양산 시점을 밝히지 않았으나 “중국의 국가 IC 산업 개발 목표 중 하나인 ‘2020년 14/16나노 IC 대량 양산’ 계획에 보탬이 될 것”이라고 밝혔다. 특히 화웨이(자회사 하이실리콘)와 퀄컴이 조인트벤처 설립에 참여하는 만큼 공정 도입 초기, 파운드리 물량을 최대한 확보할 수 있을 것으로 전문가들은 내다보고 있다. SMIC는 최근 한국의 파운드리 업체인 동부하이텍의 인수를 재추진한다는 방침을 세운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한주엽 기자>powerusr@insightsemico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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