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데일리 한주엽기자] 도시바의 반도체 사업을 총괄하는 쇼조 사이토 부사장은 지난 5일 일본 현지에서 열린 ‘세미콘 재팬 2012’ 기조연설에서 450㎜ 웨이퍼로의 전환이 조금 더 미뤄졌으면 좋겠다는 견해를 나타냈다.
사이토 부사장은 “450㎜ 장비 가격은 300㎜ 대비 1.5배, 웨이퍼 가격은 5배나 비싸다”며 “자체 조사 결과 450㎜ 생산 체제의 비용 효율이 300㎜를 앞서게 되는 시점은 2019년경이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그는 장비 업체들에게 300㎜ 웨이퍼 장비의 생산효율을 더 끌어올려달라고 요청하며 “(450㎜로의 전환을) 가능한 뒤로 미루고 싶다”고 말했다.
SK하이닉스의 권오철 사장도 비슷한 견해를 밝혔었다. 권 사장은 올해 초 열린 실적발표 IR 현장에서 “450㎜ 전환 지연은 메모리 업계에 도움이 될 것”이라며 “자꾸 새로운 시설투자를 하는 것 보단 300㎜ 시설을 최대한 활용하는 것이 좋다”라고 말한 바 있다.
2000년대 초반 다수의 메모리 반도체 업체들은 300㎜ 웨이퍼를 도입하면서 눈물을 머금었다고 한다. 장비 업체들이 200㎜ 대신 300㎜를 적극 밀면서 ‘등 떠밀려’ 투자를 진행했기 때문이다. 실제 200㎜ 장비는 70나노에서 더 이상 공정전환을 위한 개발이 이뤄지지 않았다.
국내 메모리 반도체 업계의 한 관계자는 “300㎜ 웨이퍼를 도입하고 몇 년이나 지난 후인 2005~2006년 200㎜ 공장의 원가가 가장 좋았다”고 말했다. 투자금을 회수하지 못했는데 또 투자를 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 닥치니 눈물을 머금을 수 밖에 없었다는 설명이다.
이런 투자는 공급 과잉을 낳고 시황을 어렵게 만들기 때문에 ‘더 싫다’는 속내도 있다. 최초의 300㎜ D램 공장을 꾸민 독일 키몬다는 치킨게임에서 패배해 파산했다. 메모리 반도체 업체가 4개(삼성전자 DS총괄 메모리사업부, SK하이닉스, 도시바, 마이크론)로 재편된 현 시점에선 450㎜로의 전환은 300㎜때보다 더 달갑지 않을 것이다.
한 전문가는 “메모리는 칩 크기가 작아서 대구경 웨이퍼에 대한 관심도가 떨어진다”며 “그러나 상대적으로 칩 면적이 넓은 시스템반도체를 다루는 업체들(인텔, TSMC 등)은 전환을 서두르는 입장”이라고 설명했다.
450㎜ 전환에 가장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는 인텔은 이들 메모리 반도체 업체들과는 또 입장이 다르다. 미세공정 전환이 조만간 한계에 다다를 것으로 보이는 가운데 인텔은 450㎜를 통해 원가경쟁력을 높이고 성장을 이어나가겠다는 복안을 가진 것으로 보인다. 인텔은 이를 위해 세계 반도체 장비 1위 업체인 네덜란드 ASML에 지분 투자 및 연구개발(R&D)비를 지원하면서 극자외선(EUV) 노광 장비의 성능 개선과 450㎜ 대응 장비 개발을 요청한 바 있다.
메모리와 시스템반도체 사업을 모두 보유한 삼성전자는 현재까진 중립적인 입장을 지키고 있다. 전문가들은 삼성전자가 시류를 보고 유연하게 대응하는 ‘똑똑한 1.5등 전략’을 펼칠 것이라는 관측을 내놓고 있다.
소자 업체들의 이해관계가 이처럼 다르긴 하나 어찌됐건 450㎜ 전환이 이뤄진다면 장비 업계는 신규 수주가 쏟아져 호황을 맞을 것이다. 이런 호황을 제대로 누리려면 이미 늦었지만 지금부터라도 적극적인 R&D에 나서야 한다는 것이 업계의 시각이다.
국내 장비 업체들은 영세함, 기술력 부족 등을 이유로 450㎜ 대응이 힘들다고 호소한다. 그런데 복수 관계자들의 말을 들어보면 그러한 문제보단 수요 업체(한국 메모리 반도체 업체)의 니즈가 없다는 것이 ‘소극적 대응’의 가장 큰 이유가 아닐까 싶다.
앞서 언급한 대로 메모리 반도체 업체들은 450㎜ 시대가 조금 더 늦게 열리길 기대하고 있다. 국내 장비 업체들의 매출 가운데 80%가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구매를 통해 나오고, 대부분 메모리 장비에 치중돼 있다는 점에서 혹시라도 안일한 생각을 갖고 있는 건 아닌지 걱정된다.
혁신 노력이나 진취적 도전 없이 정부 및 국내 대기업 지원만 갖고 경영을 지속할 수는 없다. 국내 장비 업체들이 세계적 기업으로 거듭나려면 메모리 편중 구조에서 벗어나 내수 의존도를 낮춰야 한다. 그런 점에서 450㎜ 장비 개발에 적극 나서고 있는 유진테크, PSK 같은 업체는 그 자체로 미래 경쟁력을 인정받을 만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