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수첩] 대멸종과 인텔
[디지털데일리 이수환기자] 45억년 이상의 지구 역사에서 생명체는 늘 한계를 시험받았다. 이 와중에 멸종은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었으며 전체 생명체의 90% 이상이 한꺼번에 사라지는 대멸종을 다섯 번이나 겪었다. 사실 지구의 유구한 역사에서 멸종은 흔하디흔한 이벤트에 불과하다. 무척 자연스러운 일이라는 얘기다.
요즘 인텔이 예전만 못하다는 시각이 많다. 작년 4분기 실적만 하더라도 브라이언 크르자니크 최고경영자(CEO)는 “이번 (4분기) 실적은 인텔이 여전히 진화하고 있으며 우리의 전략이 유효하다는 증거”라고 평가했지만 직후 주가가 9.1% 급락, 지난 2008년 이후 가장 큰 하락폭을 나타냈다. 1분기 실적 가이던스에 대한 실망감도 미리 반영됐다고 봐야 한다.
IHS, IC인사이츠, 가트너 등 주요 시장조사업체가 조사한 2015년 반도체 매출 순위에서 인텔은 1위에 올랐다. 24년 연속으로 최장 기록이다. 하지만 2위인 삼성전자를 비롯해 톱10에 속해 있는 업체와의 격차가 지속적으로 줄고 있다. 2011년 이후 인텔의 매출 추이를 보면 큰 변화가 없었다는 점, 반도체 업황이 2012년 이후 역성장이 이어지는데다가 올해를 비롯해 별다른 호재가 없다는 점에서 당분간 빙하기가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
작년 반도체 업계는 대규모 인수합병(M&A)으로 변화가 잦았다. 올해도 이런 추세가 이어질 전망이다. 지구가 이제껏 그래왔던 것처럼 경쟁력 있는 생명체가 살아남고 그렇지 못하면 멸종(M&A)을 면치 못할 것이다. 결국 인텔도 살아남기 위해 D램 사업을 과감하게 접었고 마이크로프로세서에 집중해 여태껏 시장을 선도했다. 스스로 진화한 셈이다.
조금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2004년 본격적으로 소프트웨어 사업에 진출하면서 경쟁력을 높였다. 2009년 윈드리버, 2011년 맥아피 등 운영체제(OS)와 보안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업체를 품에 안았다. 이런 점에서 4분기 사물인터넷(IoT) 그룹 매출이 소프트웨어&서비스의 매출을 넘어섰다는 것은 의미가 크다. 물론 가장 큰 비중(59%)을 차지하고 있는 클라이언트 컴퓨팅 그룹과 비교하기 어렵지만 데이터센터 그룹을 포함해 나머지 사업부 매출이 41%로 높아졌기 때문에 인텔 입장에서 신사업에 거는 기대는 상당하다고 봐야 한다.
또한 비휘발성 메모리, 그러니까 낸드플래시 관련 매출이 전년 동기 대비 21% 늘어났다. 데이터센터 그룹, IoT 그룹도 같은 기간 동안 11%, 7% 성장했다. 반면 클라이언트 컴퓨팅 그룹과 소프트웨어&서비스는 역성장했다.
인텔은 반도체를 설계하고 만드는 일에 있어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했지만 삼성전자에게 미세공정전환(10나노)에서 뒤쳐졌고 앞으로도 역전이 쉽지 않을 전망이다. 올해 낸드플래시보다 빠르고, 내구성이 높은 새로운 비휘발성 메모리 ‘3D X포인트’ 양산을 앞두고 있어서 전통적인 마이크로프로세서를 통해 벌어들이는 매출은 계속해서 줄어들 가능성이 높다. 3D X포인트는 낸드플래시와 D램의 중간선상에 있는 일종의 P램이다. 바꿔 말하면 1985년 포기한 D램 사업에 30여년 만에 재진출하는 셈이다.
앞서 언급했지만 살아남기 위해 버렸던 D램이 진화해 P램으로 돌아왔다. IoT는 전체 매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크지 않지만 성장 가능성이 무척 높다. PC 시장은 꾸준히 위축되고 있고 스마트폰, 태블릿과 같은 스마트 기기에서의 마이크로프로세서 시장 공략은 여전히 답보 상태다. 이런 상황에서 인텔의 선택은 이제껏 그래왔던 것처럼 스스로 진화하는 방향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이번 빙하기의 본격적인 시작인 2016년 얼마나 순도 높은 실적을 올릴 수 있느냐가 무척 궁금하다. 살아남으면 승자, 삐끗하면 대멸종이다.
<이수환 기자>shulee@ddail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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