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데일리 한주엽기자] 인텔의 3대 최고경영자(CEO)였던 앤디 그로브가 1985년 중반 D램 사업을 전격 포기한 일화는 반도체 업계에선 전설처럼 전해지고 있다. 당시 인텔은 D램 공장을 폐쇄하고 8000명이 넘는 직원을 해고하는 등 뼈를 깎는 구조조정을 단행했다. 1970년대 D램을 최초 개발한 인텔이 해당 사업을 정리한다는 것은 당시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인텔이 D램 사업을 포기했던 이유는 경쟁 심화로 수익을 내기 어렵다고 봤기 때문이다. 당시 인텔은 우월한 생산 능력을 가진 일본전기, 도시바, 미쓰비시, 히타치 같은 일본 굴지의 전자 회사들의 원가 경쟁력을 따라갈 수가 없었다고 판단했다. 결과적으로, 인텔의 D램 사업 포기는 탁월한 결정이었다. PC용 마이크로프로세서(MPU) 사업에 집중한 인텔은 1990년대 매년 30% 이상 매출 성장률을 보였고 2012년 기준 연간 매출 500억달러가 넘는 세계 제 1의 반도체 업체로 도약했다. 앤디 그로브가 자존심을 버리지 않았더라면, 인텔은 파산한 D램 업체인 독일 키몬다, 일본 엘피다의 길을 걸었을 수도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근래 들어 인텔은 마이크로프로세서의 최대 수요처인 PC 시장의 역성장으로 새로운 위기 상황을 맞이하고 있다. 2012년 인텔의 연간 매출은 533억달러로 전년 대비 1.2% 감소했고 영업이익은 146억달러로 16.2%나 줄어들었다. 올해도 전년 대비 매출액이 1.4% 떨어질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인텔 측은 내년도 매출액이 2.1% 성장할 것이라고 밝혔지만 이는 시장의 기대치 대비로는 낮은 것이라는 평가다. 인텔은 세계 경기 불안으로 지난 2008년과 2009년에도 매출 역성장세를 기록한 적이 있다. 그러나 지난해와 올해의 매출 감소세를 경기 탓으로만 돌리기는 어렵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시각이다. 퀄컴은 지난해 전년 대비 30%에 가까운 매출 성장세를 보였다. 인텔이 스마트폰 칩 시장에 성공적으로 안착했더라면 매출이 큰 폭으로 늘어났을 것이다. 인텔은 이 같은 위기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21일(현지시각) 개최된 2013 인텔 연례 투자설명회에선 두 가지 파격적인 계획이 공개됐다. 첫 번째는 자사의 반도체 생산 공장을 개방하고 다른 팹리스 업체의 칩을 본격적으로 생산하겠다는 것이다. ‘우리 칩은 우리 공장에서, 우리 공장에선 우리 칩만 만든다’는 경영 기조는 인텔의 자존심 같은 것이었다. 타사와 자사 제품을 경쟁력을 구분짓는 핵심 요소이기도 했다. 인텔이 자사 공장에서 타사의 칩을 생산한다는 것은 이러한 자존심을 버리는 파격으로 평가되고 있다.
폴 오텔리니에 이어 인텔의 6대 CEO로 최근 취임한 브라이언 크르자니크는 이날 투자설명회에서 “앞으로 파운드리 거래 기업을 늘려갈 것”이라고 말했다. 르네 제임스 인텔 회장 역시 “경쟁사(퀄컴, 미디어텍, 엔비디아, AMD와 애플까지)의 칩도 위탁생산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인텔 주주들은 우려감을 나타냈다. ‘앞선 공정 능력’이 인텔의 최대 무기였는데 이를 직간접 경쟁사에 개방할 경우 자사 제품의 경쟁력 일부가 상실되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이에 대해 크르자니크 CEO는 “이쪽(파운드리 사업 강화)이 주주들에게 보다 이익이라고 판단했다”고 밝혔다. 제품 쪽에서 일부 상실이 있더라도 세계 제 1의 공장 경쟁력은 계속 가져가겠다는 의지를 표명한 것이라는 해석이다.
인텔의 또 다른 파격은 자사 핵심 칩을 다른 공장에서 생산하겠다는 계획이다. 내년 하반기 출시될 인텔의 첫 모뎀 통합 시스템온칩(SoC)인 소피아(SoFIA)는 다른 업체의 공장에서 생산된다. 소피아는 중저가 시장을 노린 제품으로 3G(HSPA+) 모뎀은 물론 와이파이, 블루투스, GPS 등 다양한 통신 기능이 통합된다. 2015년 출시될 롱텀에볼루션(LTE) 모뎀 통합 SoC인 소피아 LTE 역시 외부 파운드리를 통해 생산될 예정이다. 인텔이 자사 칩을 외부 파운드리를 통해 생산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인텔은 지난 2009년 아톰칩 생산 일부를 대만 TSMC에 맡긴 적이 있다. 그러나 당시 아톰 SoC와 지금의 아톰은 전략적인 무게감에서 차이가 있다. 아톰 SoC는 이제 인텔의 주력 제품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텔은 고급 공정에 특화된 자사 공장에서 중저가 칩을 생산하는 것이 비효율적이라고 판단한 듯 하다.
자사 공장을 외부 팹리스 업체에 개방하고, 자사 중저가 주력 칩을 외부 파운드리를 통해 생산하겠다는 것은 그간의 자존심을 내던지고 보다 유연한 사업 모델을 가져가겠다는 뜻으로 풀이할 수 있다. 성장하기 위해 어떤 사업이든 하겠다는 얘기다. 실제 인텔의 이 같은 발표 이후 외신에선 인텔이 애플 칩을 위탁생산할 가능성이 있다고 보도되고 있다. 승자독식 구도로 변모한 모바일 프로세서 시장에서 애플, 퀄컴, 미디어텍 정도만 파운드리 고객으로 끌어들인다면 반도체 업계에서 인텔의 지배력은 보다 공고해질 수 있다는 분석이다. 인텔은 그만한 기술 경쟁력과 자본을 갖고 있다. 이럴 경우 파운드리 업체(TSMC, 글로벌파운드리, 삼성전자)의 실적은 크게 줄어들 것이 분명하다. 물론 쉽지 않은 일이다. 훗날 크르자니크 CEO가 앤디 그로브와 같은 세기의 전략가로 칭송받을 수 있을 지 주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