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데일리 한주엽기자] 메모리 반도체 시장에서 구매자(완제품 업체)보다 공급자(소자 업체)의 지위가 높아질 것이라는 전망이 조심스럽게 제기되고 있다. D램과 낸드플래시를 생산하는 메모리 반도체 업체가 3~4개로 좁혀진데다 공정 고도화에 따른 기술 장벽 및 대규모 투자를 병행해야 하는 위험 요인으로 신규 업체의 진입이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분석이 나오고 있기 때문이다.
10일 메모리 반도체 업계 전문가들은 상위 업체들의 과점화 현상이 심화된 현 상태가 지속될 경우 메모리 가격이 급락하는 다운텀에서도 과거와 같은 ‘치킨게임’은 일어나지 않을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원가 이하로 메모리를 판매하는 대신 생산량을 줄이고 수요와 공급의 균형을 맞춰 가격을 끌어올리는 것이 보다 이익이기 때문이다.
최근 낸드플래시 시장에서 이러한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시장 2위 업체인 도시바가 낸드플래시 생산량을 30% 줄였고 1위 업체인 삼성전자도 낸드플래시를 생산하던 기흥 14라인과 미국 오스틴 라인 등을 시스템 반도체 전용 라인으로 전환, 자연 감소분이 생기면서 최근 가격이 급등하고 있다.
업계 관계자는 “도시바가 낸드플래시를 30% 감산한 이후 시장 가격은 30% 이상 올랐다”라며 “감산에 따른 손실보단 시장 가격이 올랐을 경우 이익이 더 많다”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앞으로는 이런 공급자 위주의 시장으로 서서히 변화할 것으로 본다”며 “D램 업계에도 이러한 인식이 조금씩 생기고 있다”라고 말했다.
이런 현상이 생기는 근본적인 이유는 더 이상 회로 선폭을 줄이기가 힘들기 때문이다. 미세공정 전환에 성공하더라도 과거와 같은 50% 이상의 생산성 증대 효과는 없을 것이라는 분석이 있다. 지금까지는 대규모 시설 및 공정 투자→원가경쟁력 확보→시장 경쟁력 우위라는 경쟁 공식으로 메모리 반도체 시장이 움직였다. 원가경쟁력을 확보한 업체는 다운텀에서 출혈 경쟁을 유도해 ‘나는 남고 너는 손해보는’ 치킨게임을 이끌었다.
그러나 회로 선폭이 10~20나노대로 한계치에 근접하고 살아남은 업체도 손에 꼽을 정도로 줄어들어 이 같은 경쟁 공식은 퇴색하고 있다는 것이 업계의 설명이다. 한 관계자는 “삼성전자, SK하이닉스, 도시바, 마이크론 등 수십개 업체들과의 경쟁에서 살아남은 리딩 업체들이 다운텀에선 여지없이 이익이 큰 폭으로 줄거나 적자를 내고 있는데, 앞으로는 원가 이하 혹은 싼 값에 제품을 던지지 않겠다는 의미가 아니겠느냐”고 말했다.
즉, 죽기 살기의 경쟁이 아니라 다운텀에선 서로 적자를 내지 않도록 자연스럽게 생산량을 감축하고, 시장 가격을 높인다는 것이다. 공급자 위주 시장이 만들어질 수 있다는 분석도 이렇게 나왔다. 다만 이런 시대가 열릴 경우 사소한 문제로 담합 혐의를 받을 수도 있다는 것이 관련 업계의 설명이다.
고용량 저전력 메모리와 같은 부가가치 높은 제품의 발빠른 개발이 핵심 경쟁력이 될 것이라는 관측도 나온다. 김동현 SK하이닉스 수석은 “최근의 메모리 반도체 시장은 대규모 투자와 빠른 공정 미세화를 바탕으로 한 원가 경쟁에서 벗어나 다양한 제품과 신기술을 바탕으로 한 고부가가치 경쟁으로 패러다임이 전환되고 있다”라고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