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더스 체인저] ⑤ 더 이상 '슈퍼을'은 없다…K-배터리, 대안 찾기 집중
미중 패권경쟁과 국지적 충돌로 인해 글로벌 정세가 시시각각 빠르게 변화하고 있다. 이에 따라 전통적 산업군 역시 그 경쟁양상이 하루가 다르게 바뀌고 있다. 미래 핵심 경쟁력으로 꼽히는 반도체를 시작으로 디스플레이, 이차전지 등 공급망 확보가 무엇보다 중요한 난제로 꼽힌다. 또한 AI를 시작으로 소부장 기업뿐만 아니라 제조사까지 신규 시장 선점에 열을 올리고 있다. 이에 <디지털데일리>는 19주년을 맞이해 산업군을 뒤바꾸는 주요 요소들을 살펴보고 그에 따른 변화 양상을 짚어보고자 한다. <편집자주>
[디지털데일리 고성현 기자] 글로벌 전기차 제조사의 시장 영향력 확대에 배터리 셀 업계가 긴장하는 분위기다. 테슬라가 4680 원통형 배터리 등 내재화 계획을 그대로 유지한 가운데, 이를 모방하려는 타 전기차 업체들의 공급망 장악 속도가 빨라지고 있어서다. 이에 따라 배터리 셀 제조사의 가격 협상력이 크게 낮아지고, 장기적으로는 수직적인 원·하청 업체가 될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업계에 따르면 최근 자동차 제조사는 배터리 전구체·양극재·동박·전해액 등 주요 소재사를 만나 직접 협력을 추진하고 있다. 기존 배터리 제조사가 직접 선정·구축해왔던 업스트림(Upstream) 영역에 직접 관여해 배터리 공급망을 안정화하겠다는 의도다. 미국 인플레이션 감축법(IRA), 유럽 핵심원자재법(CRMA) 등 주요 전기차 시장의 광물·소재 원산지 표기 요구가 늘자 이를 직접 들여다보고 관리하겠다는 의미도 담겨 있다.
공급망 수직계열화를 적극적으로 추진하는 기업은 업계 선두주자인 테슬라다. 테슬라는 초기 파나소닉 등을 통해 배터리를 수급받아 왔지만, 전기차 판매량이 급증한 이후 캘리포니아·텍사스 등 기가팩토리에 자체 배터리 라인을 구축하고 부품 내재화에 나섰다. 여기에 핵심 원료인 리튬도 채굴권을 확보하거나, 정제 시설을 직접 마련하며 공급망관리(SCM) 구축에 힘쓰는 모습이다.
지난달 언론 보도 등을 통해 알려진 LG에너지솔루션으로의 외주 건도 이와 관련된 사례 중 하나다. 업계에 따르면 테슬라는 최근 LG에너지솔루션에 6조원 규모 전극 주문을 추진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르면 하반기쯤 계약이 체결될 수도 있다는 관측도 나온다.
이는 테슬라의 4680 원통형 배터리 양산 능력이 일정 수준에 이르지 못한 데 따른 결정으로 해석된다. 아직 전극 양산 기술이 안정적이지 못한 만큼, 배터리 업체의 영향권 아래에서 벗어나기는 힘들다는 의미다.
반면 이를 다르게 해석하는 시각도 있다. 배터리 기술 미성숙에 따라 일부 핵심 공정의 양산에는 차질이 있으나, 조립·화성 등 후공정으로 분류되는 분야에서는 내재화를 성공했다는 이유에서다. 전극 외주 공급을 시작으로 배터리 셀 생산이 안정화된다면 장기적으로는 완전 내재화까지 가능할 것이라는 관측도 있다.
다른 자동차 제조사들은 테슬라의 내재화 방식을 차용해 SCM을 장악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현대자동차그룹은 남양연구소 등에서 자체 배터리 기술을 내재화하고 있는 한편, 배터리 공급망의 업스트림 업체를 직접 지정하고 있다. 엘앤에프·유미코아와 SK온과의 계약이 대표적 사례다. 업계에서는 현대차그룹이 장기적으로 전구체·양극재·전해액·음극재 등을 생산하는 소재 업체와 직납할 가능성을 열어두고 있다고 보고 있다.
폭스바겐그룹은 2022년 설립한 파워코를 통해 배터리 제조 기술을 직접 내재화하는 한편, 지분 투자한 노스볼트를 통해 배터리 공급처를 확보했다. 리튬 역시 간펑리튬을 통해 수급받고 있다. 제너럴모터스(GM)·BMW·포드·스텔란티스 등 유수 완성차 기업들도 원재료 직접 확보, 배터리 기술 내재화 등을 추진하고 있다. 리비안 역시 삼성SDI로부터 공급받는 배터리의 원료를 직접 지정하려는 것으로 알려졌다.
업계에서는 이같은 전기차 업체들의 방향성이 장기적으로 배터리 셀 제조사에 악재로 작용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전기차 업체의 기술 내재화·SCM 진입으로 원료 가격 상승에 따른 부가적 이익, 높은 기술 진입장벽 등 이점이 퇴색되면서 가격 협상력(Bargaining Power)을 내줄 수 있다는 지적이다. 특히 지금과 같은 일시적 시장 수요 정체기(Chasm) 국면이 이를 가속화할 수 있다는 일각의 분석도 있다.
노우호 메리츠증권 연구원도 "이런 계약 양상이 진행된다면 배터리 업체가 지니고 있던 바게닝 파워와 균형이 자동차 OEM에게로 넘어갈 수도 있다"고 분석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배터리 셀 업체도 자체적인 대안을 마련하는 모양새다. 기술 진입 문턱을 높이고 생산성을 높이기 위해 자동화·무인화 추진 속도를 높이는 한편, 건식 공정 등 차세대 공정과 미드니켈·하이망간과 같은 신규 제품 도입을 추진하고 있다. 최종 애플리케이션 의존도 역시 전기차에서 고성장세가 예상되는 에너지저장장치(ESS)로 확대하는 추세다.
특히 ESS 시장은 전세계적인 탄소중립 기조 영향 등으로 시장 주목도가 상승하는 추세다. 재생에너지는 발전량 변동이 크고 불안정한 재생에너지를 보조하는 필수적 역할인 만큼, 이에 집중하겠다는 의도로 풀이된다.
구글·마이크로소프트(MS)·아마존웹서비스(AWS)·메타 등 하이퍼스케일의 인공지능(AI) 데이터센터 증설이 늘어나는 점도 기회 요인이다. AI 데이터센터가 범용 대비 고전력을 요구하는 탓에 ESS 및 무정전전원장치(UPS) 대수가 확대되는 탓이다. 에너지로 인한 지정학적 리스크 및 비용 절감, 확대되는 ESG 요건 충족 등도 ESS 도입 확대를 촉진시키는 요인 중 하나다.
ESS에 대한 관심도는 배터리 셀 제조사의 언급에서도 확연히 드러난다. 손 미카엘 삼성SDI 중대형전지 전략마케팅 부사장은 지난달 30일 진행된 1분기 컨퍼런스콜에서 "AI 성장은 에너지저장장치(ESS) 배터리, 전자재료 소재 등 다방면에 걸쳐 긍정적인 영향을 줄 것"이라고 강조했다.
손 부사장은 "AI 시장 성장은 데이터센터 전력 수요 증가로 이어지는데, 전력 수요 규모가 2030년까지 현재 규모 대비 2배 이상 늘어날 것으로 예상된다"며 "전력 수요 증가에 따라 전력용 ESS는 물론 데이터센터 백업을 위한 무정전전원장치(UPS)가 증가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최신근 ESS 전지기획관리담당도 "SS 시장 내 LFP 수요 증가에 대비해 오는 2025년 하반기 난징 라인에서 LFP 롱셀 배터리 생산을 시작하고, 애리조나 공장 내 ESS 배터리 전용공장을 17GWh 규모로 구축하겠다"며 "당사의 시스템통합(SI) 역량을 활용해 성장 포텐셜이 높은 ESS 시장 판도를 넓힐 계획"이라고 밝힌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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