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KT 40년] ⑥ 최태원 손 맞댄 故 최종현 “그 때도 맞고 지금도 맞다”
전세계 내노라 하는 이동통신사들이 총출동하는 스페인 바르셀로나 모바일월드콩글레스(MWC)에서 올해도 SK텔레콤은 메인홀 중심에서 우리나라 정보통신기술(ICT)을 글로벌에 전파하고 있습니다. 올해로 40주년을 맞이한 SK텔레콤은 국내 1위 이통사를 넘어, AI 컴퍼니로 또 다른 패러다임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이 자리를 빌어 과거 40년을 조망해보고 미래 ICT 개척자로서 SK텔레콤의 비전을 살펴봅니다. <편집자주>
[디지털데일리 김문기기자] “재계가 단합된 모습을 보이고 국민과 정부의 신뢰를 얻기 위해서는 선경(현 SK)의 제2이통사 참여 포기가 불가피하다.”
故 최종현 선경그룹 회장이 돌연 제2이통사 참여 포기를 선언했다.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재기를 노렸던 SK그룹에게는 청천벽력같은 포기 선언이었다. 선정 이후 일주일만에 사업권을 내려놓는 순간에도 선경그룹은 객관적인 실력을 검증받아 사업 재추진 의사를 밝힌 바 있었다. 그럼에도 최종현 회장은 왜 참여 포기를 주장했을까?
붕괴된 신뢰
전 정권에서의 제2이통사 선정 불발은 이후 많은 후유증을 낳았다. 소신을 잃은 정부와 이를 믿을 수 없는 기업의 관계회복은 더디게 진행됐다. 게다가 정치권은 여전히 따가운 눈길을 보냈다. 그러다보니 체신부 역시도 신중을 기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제2이통사는 언젠가는 선정해야 할 필수불가결한 숙제였다.
1993년 12월 10일. 체신부가 내놓은 묘안은 이랬다. 우선 민간의 자율성을 최대한 존중하면서도 많은 기업들이 참여할 수 있는 ‘단일 컨소시엄 방식’을 채택했다. 그리고, 신뢰를 잃은 정부와 기업간의 관계를 봉합하고자 민간경제 5단체 가운데 전 산업분야의 대표성을 띄면서도 자율조정 능력이 가장 높은 것으로 인정되는 전경련에 의뢰하기로 했다. 기간은 2개월. 민간에게 맡긴 후에도 방법이 없다면 체신부가 직접 움직이기로 했다.
여기에 체신부는 한국통신이 보유하고 있는 한국이동통신 주식지분 64% 가운데 민간업체가 경영권을 획득하는데 충분한 규모의 주식인 45% 이내를 매각토록했다.
즉, 제1이통사 구실을 하는 한국이동통신을 민영화함과 동시에 제2이통사를 선정하겠다는 투트랙 전략이었다. 기업의 불만을 기업 스스로가 선정할 수 있게 해주고, 각 컨소시엄을 주도한 재벌그룹의 경쟁을 억제하면서 잡음을 최소화하겠다는 심산이었다.
물론, 기업의 셈법은 복잡해졌다. 전경련 주도의 단일 컨소시엄에 참여한다면, 주주구성에서 제1대 주주로 올라서야 한다는 물밑 경쟁을 견뎌야 했다.
반대로 한국이동통신 주식매입을 통해 경영권을 인수하는 방법이 있기는 하나 막대한 자금을 쏟아 부어야 하기 때문에 부담이 상당한 선택지였다. 엎친데 덮친격으로 선정방식이 발표되자마자 한국이통동신의 주가가 폭등했다. 선정 전인 11월까지만 해도 15만원이었던 주가는 1개월만에 23만원대로 올라섰다. 그 규모가 얼만고 하니 하루에 약 100억원씩 늘어날 정도였다. 상황이 이러니 재벌기업들조차 자금부담이 너무 커 계획 자체를 재검토해야 한다고 토로했다.
故 최종현 회장, 가지 않는 길을 택하다
다시 한번 기회가 열리긴 했으나 선경의 속내는 더 복잡해졌다. 아이러니하게도 최종현 회장이 1993년 전경련 회장으로 추대됐기 때문. 민간자율에 맡기기로 한 전경련 수장이 하필이면 선경의 회장인 셈이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건 최 회장이 전경련 회장으로 추대된 후 민간업계의 효율적인 사업조정자 기능을 내걸고 ‘자율조정위원회’를 출범시켜놨다는 점이다. 이 기구는 전경련 회장단으로 위원이 구성되고 실무위원회의 회장단 그룹의 기획실장이 맡는 기구로 제2이통사 컨소시엄 구성에도 핵심 역할을 담당했다.
1994년 새해가 밝자마자 전경련은 기민하게 움직였다. 1월 11일 첫 회의를 개최하고 모든 의사결정과 최종결정을 회장단회의가 맡기로 결정했다. 시한은 2월 17일까지. 단일 컨소시엄을 완성하겠다는 목표를 세웠다. 그리고 15일에는 비공식회의를 개최했다. 당시 故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이 회장단을 초청하는 형식으로 이뤄졌다. 장소는 故 이병철 삼성그룹 회장이 최고의 한옥을 짓겠다는 목표로 서울 한남동 자택 내 마련한 영빈관인 승지원에서 열렸다. 업계는 이 모임을 가리켜 ‘승지원 결의’라 불렀다.
이 1차 승지원 결의가 끝나고 난 17일이 바로 최종현 회장의 깜짝 발표가 있었던 때다. ‘선경의 제2이통사 참여 포기’. 각본없는 드라마의 반전을 마주한 듯 업계는 그야말로 충격 그 자체였다. SK그룹은 1차 제2이통사 선정에서 큰 격차를 기록하며 1위를 차지한 유력 후보였다. 또 다른 대안인 한국이동통신 인수는 시간이 갈수록 부담이 배가되고 있는 상태. 선경 입장에서는 편한 길을 뿌리치고 모두가 ‘노(NO)’라고 외친 가시밭길을 선택한 셈이었다.
최종현 회장의 결단에 오히려 전경련 회장단이 이를 말리고 나섰다. 아무리 국민과 정부의 신뢰를 얻기 위함이라고 해도 선경에게 가는 리스크가 너무나 컸다. 그러다보니 경쟁 재벌기업들조차 최종현 회장을 뜯어 말리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연출됐다. 선경그룹 내부도 최종현 회장의 결단에 한숨을 내쉬었다. 그만큼 자금 부담이 상당했다.
결과적으로 선경은 한국이동통신 주식입찰 마지막날인 1월 25일 오후 가까스로 입찰 참여에 성공했다. 유공과 흥국상사, 선경인더스트리 등 3개 계열사를 통해 437억원의 입찰보증금을 납부한 이후 26일 한국이동통신의 주식 23%인 127만5천주를 4271억2500만원에 매입키로 하면서 지분인수를 마무리 했다. 그룹투자규모는 1조7000억원에서 4000억원을 추가 조성해야 하는 상황임에도 최종현 회장은 의연했다. 오히려 인수금액에 대한 부담과 제2이통사 포기와 관련한 고민을 허심탄회하게 풀어 놓으면서도 정보통신사업 진출이 부담을 이길 정도로 중요하고 진출 자체가 금액으로 환산하기 어려울 만큼 값지다고 강조했다.
조율자로 나선 최종현 회장
최종현 회장의 역할은 끝나지 않았다. 제2이통사를 위한 컨소시엄 구성을 성공시켜야 하는 중재자 역할을 충실히 수행했다. 만약 전경련이 컨소시엄 구성에 실패한다면, 잇속만을 챙기는 재벌기업 이미지와 위상에 흠결이 생길 수 있었다. 게다가 정부, 더 나아가 정치권에 또 다른 빌미를 내어줄수도 있었다.
남은 유력기업인 포항제철과 코오롱의 1대 주주를 위한 경쟁 상황 속에서도 최종현 회장은 전경련 회장단과 함께 끊임없이 중재 자리를 마련했다. 4차까지 이어진 승지원 결의, 수차례 걸린 양측대면회동 등을 통해 2월 28일 단일 컨소시엄 구성을 완성하는데 성공했다.
그리고 선경그룹은 유공과 선경인더스트리, 흥국상사 등을 통해 3월 16일 한국이동통신의 주식 매입금 4271억2000만원을 납입했다. 이후 한국통신이 보유한 한국이동통신 주식 33%가 6월 2일 증권시장에 매각됨에 따라 비로소 선경그룹이 한국이동통신의 최대주주로 올라섰다.
7월 7일 선경그룹은 한국이동통신 임시주주총회를 개최하고 경영권을 최종적으로 취득했음을 알렸다. 한국이동통신의 대표로 손길승 부회장을 선임했다.
같은 달 18일 손 부회장은 취임식을 통해 “민간기업으로의 발전적인 새 출발을 위해 민간기업의 활력과 선경그룹 경영의 특징을 한국이동통신에 접목해 한마음 한뜻으로 세계 일류의 종합정보통신 기업이라는 목표를 달성해 나가겠다”고 선언했다.
현재 SK텔레콤(전신 한국이동통신)은 명실상부 국내 1위 이동통신 회사를 넘어 전세계적으로 각광받는 기업으로 성장했다. 전세계 이통사가 모두 모이는 세계이통동신연합회 GSMA가 개최하는 MWC에서도 타국 이통사와 달리 가장 핵심공간을 차지하고 있다.
이는 당시 최종현 회장의 용단이 없었다면 불가능했던 해피엔딩이다. 당시에도 최 회장의 그같은 판단에 예상치 못한 결단이라 추켜세웠으며, 현재도 그 결단이 주효했음이 드러났다. 그 때도 맞고, 지금도 맞는 용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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