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체

[소부장 TF] ③ 日 수출규제 역설…일본 반도체 '한국 러시'

김도현 기자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

전세계적으로 반도체와 디스플레이, 이차전지 등 제조분야의 산업적 가치가 중요해졌고, 그에 따라 소재·부품·장비(소부장)산업에 대한 관심도 어느 때보다 높아졌다. 하지만 미중 패권경쟁에 따른 아시아 지역의 변화와 유럽연합(EU)의 적극적인 공세로 인해 우리나라는 제품만 생산해내는 위탁국가로 전락할 우려가 크다. 해외 정세에도 흔들림 없는 K제조업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물밑에서 구슬땀을 흘리는 소부장 강소기업 육성을 통한 경쟁력 제고가 무엇보다 중요하다.

<소부장 미래포럼>은 <소부장 TF>를 통해 이같은 현실을 직시하고 총체적 시각을 통해 우리나라 소부장의 과거를 살피고 현재를 점검하며 미래로 나아가기 위한 숙제를 되짚어보고자 한다. [편집자주]

[디지털데일리 김도현 기자] 지난 2019년 일본 수출규제가 시작될 때 국내 반도체·디스플레이 제조사가 직격탄을 맞을 것이라는 평가가 우세했다. 핵심 품목의 일본 의존도가 높아 조달에 차질을 빚으면 정상적인 공장 가동이 어려울 것이라는 이유에서다.

하지만 반전이 일어났다. 일본 소부장 기업이 대거 한국 투자를 단행한 것. 삼성전자, SK하이닉스, 삼성디스플레이, LG디스플레이 등 유수의 고객들과 관계를 유지하고 싶었던 것으로 풀이된다.

지난 4월 김동연 경기도지사가 타네이치 노리아키 TOK 대표와 투자 양해각서를 체결했다 [사진=경기도청]

◆필수 소재·장비 독점하는 ‘슈퍼을(乙)’마저 한국행

한국과 일본은 지리상으로 멀지 않아 현지에서도 국내 고객 수요 대응이 가능했기 때문에 일본 협력사가 우리나라에 비중 있는 연구개발(R&D) 및 생산 기지를 세우는 일은 많지 않았다. 이러한 분위기가 달라진 건 일본 정부의 대한(對韓) 수출규제 이후다. 각 분야에서 사실상 독점적 지위를 가진 업체들이 한국으로 몰려들었다.

해당 규제가 발효된 지 1년도 지나지 않아 도쿄오카공업(TOK)은 인천 송도 공장에서 극자외선(EUV)용 포토레지스트(PR) 생산을 개시했다. EUV는 기존 불화크립톤(KrF), 불화아르곤(ArF) 등보다 빛의 파장이 짧아 미세공정 구현에 유리한 기술이다.

특히 EUV PR은 제재 품목 3종에 포함되면서 우려가 나온 바 있다. 문제는 당시 EUV 공정을 상용화한 곳이 대만 TSMC를 제외하면 삼성전자, SK하이닉스 정도였던 점이다. TOK 입장에서도 한국의 2곳을 놓치면 실적 하락이 불가피했다.

미국 듀폰이 충남 천안에 EUV PR 시설을 마련하고 동진쎄미켐, SK머티리얼즈퍼포먼스 등이 PR 사업을 강화한 부분도 TOK가 한국에서 처음으로 EUV PR 제작하기로 한 결정에 영향을 미쳤다는 후문이다.

같은 해 고유전재료 시장점유율 50% 이상을 차지하는 아데카도 개발 기능 일부를 한국으로 옮겼다. 고유전은 회로 누설 전류를 차단하는 역할을 하는데 D램 공정 미세화로 사용량이 급증했다. 아데카는 최대 고객인 삼성전자와 원활한 소통을 위해 경기 수원 R&D 센터를 2배 확장했고 전북 전주에 생산라인을 설립한 바 있다. 최근에는 이 공장 증설 소식을 전하기도 했다.

질량유량 제어기기(MFC)를 다루는 호리바그룹도 지난 2021년 초 최상단 모델을 한국에서 양산하기로 했다. MFC는 반도체 증착 및 식각 공정에서 가스 공급의 정밀 제어 역할을 한다. 호리바그룹은 관련 시장점유율 60%에 달한다. 회사 관계자는 “한국이 주요 거점이라는 인식을 공유하고 고객 맞춤형 대응을 위한 결정”이라고 밝혔다.

솔더레지스트 업계 1위 다이요홀딩스, TOK처럼 PR을 납품하는 스미토모, 반도체용 석영 유리 공급사 토소, 황화카르보닐 생산 업체 간토덴카공업, 반도체 웨이퍼 연마 소재사 쇼와덴코, 이미지센서용 컬러필터 재료 제공하는 후지필름 등도 연이어 한국 거점을 강화한 바 있다.

반도체 장비 부문 세계 4위 도쿄일렉트론(TEL) 역시 경기 지역에 테크니컬센터, R&D센터 등을 세우면서 삼성전자, SK하이닉스 등 대응력을 높인 상태다.

세미콘 코리아 2023 행사장 내 TEL 부스

◆日 언론·기업, 자국 정책에 자조적인 목소리

일본의 노골적인 움직임으로 국내에서는 소부장 육성에 힘이 실렸다. 삼성 SK LG 등 계열사들은 국산화 작업에 착수했고 토종 기업과 협력 빈도를 늘렸다. 이같은 흐름에 대해 일본 닛케이신문은 “한국의 반도체 소재 국산화로 일본이 타격을 입었다”며 삼성전자 등 상황을 소개한 적이 있다. 한국무역협회 자료를 토대로 실제 피해 사례도 보도했다.

또 다른 일본 주요 언론 아사히신문은 ‘3년째 우책(愚策)의 극치’라는 제목의 사설을 올린 바 있다. 당시 하코다 데쓰야 논설위원은 일본 수출규제를 비판했다.

올해 2월 국제반도체장비재료협회(SEMI)가 서울 강남구 코엑스에서 주최한 ‘세미콘 코리아 2023’에서 만난 일본 회사 담당자들도 비슷한 목소리 냈다. 한 장비업체 관계자는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매우 중요한 고객사다. 수출규제는 자국 기업에 부정적인 ‘제 발등 찍는’ 정책”이라고 지적했다.

해당 전시회에는 TEL을 비롯해 30개에 가까운 일본 기업이 참여했다. 네덜란드 ASML에 노광 분야에서 밀린 니콘, 한미반도체 등 경쟁사 약진을 견제해야 하는 디스코, 반도체 검사 장비 고객을 넥스틴에 빼앗긴 히타치 등은 마케팅 강화 차원에서 작지 않은 규모로 부스를 차렸다.

앞서 언급한 일본 소재 업계도 대거 참석했다. 당시 한 기업 관계자는 “한국은 일본 협력사들에게 놓칠 수 없는 시장이다. 일본 수출규제 아니라 한국 수입규제를 걱정해야 할 정도”라며 “양국 관계가 정상화돼가는 분위기인 만큼 두 나라 기업 간 협업이 강화되기를 기원한다”고 이야기했다.

김도현 기자
dobest@ddail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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