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데일리 김도현기자] 일본 수출규제가 시작된 지 1년. 예상과 다른 분위기가 흐르고 있다. 국내 반도체 업계에 대한 공격은 오히려 일본의 발목을 잡은 모양새다. 일본 반도체 기업은 자국 정부 규제를 피해, 한국으로 넘어오고 있다.
2일 업계에 따르면 일본 도쿄오카공업(TOK)은 인천 송도 공장에서 극자외선(EUV)용 포토레지스트(PR) 생산을 시작했다. EUV는 기존 공정보다 빛의 파장이 짧아, 반도체 미세화에 필수적인 기술이다.
PR은 반도체 노광 공정에서 활용된다. 웨이퍼 위에 바르고 노광 장비로 빛을 쏘면 빛의 노출에 반응해 화학적 성질이 변하면서 회로 패턴이 새겨진다. PR은 불화크립톤(KrF), 불화아르곤(ArF), EUV에 따라 성질 차이가 있다. EUV는 가장 높은 기술력을 요구해 TOK, JSR, 신에츠화학 등 일본 업체가 장악하고 있다.
삼성전자도 EUV PR은 TOK로부터 수급하고 있다. 수출규제 당시 3개 품목에 포함되면서, 소재 확보에 대한 우려가 있기도 했다. 다만 EUV 공정을 도입한 업체는 삼성전자와 TSMC 정도여서, 공급사 입장에서도 특정 고객사 의존도가 높은 상황이다. 삼성전자를 놓치면 실적 하락이 불가피하다는 의미다.
미국 듀폰이 충남 천안에 EUV PR 생산시설을 마련하고, 동진쎄미켐과 SK머티리얼즈 등이 PR 사업을 강화한 부분도 TOK의 결정에 영향을 미쳤다. 이들 업체의 기술력은 아직 부족하지만, 삼성전자와 협업할 경우 개발 속도를 끌어올릴 수 있다. 자국 정부 기조에도 TOK가 국내 법인에서 EUV PR을 생산하게 된 이유다.
반도체 업계 관계자는 “일련의 상황 속에서 TOK도 위기감을 느꼈을 것”이라며 “더 늦춰지면 삼성전자라는 대형 고객사를 잃게 되기 때문에 적극적으로 EUV PR의 국내 생산을 검토한 것으로 안다”고 설명했다.
이외에도 복수의 일본 업체가 한국으로 이동하는 추세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를 잡기 위함이다.
다이요홀딩스는 지난 5월 충남 당진에 반도체 패키징·디스플레이용 드라이필름형 솔더레지스트 생산공장을 짓는다고 밝혔다. 5년간 170억원을 투자한다. 다이요홀딩스는 전 세계 솔더레지스트 80% 이상을 담당하고 있다. 이번 결정으로 그동안 일본에서 전량 수입하던 드라이 필름을 국내 생산하게 됐다. 솔더레지스트는 프린트 배선판(PWB)의 회로 패턴을 보호하는 절연 코팅 재료다. 전기적 불량 방지 및 절연성 확보에 필수적이다.
반도체 장치용 석영 유리를 제조하는 토소는 한국 법인을 설립, 내년 제품 양산이 목표다. 글로벌 장비업체 도쿄일렉트론(TEL)은 삼성전자 평택캠퍼스 인근에 테크니컬센터를 신설해 지원사격에 나선다.
아데카는 전북 전주에서 고유전 재료 등을 생산할 방침이다. 고유전은 회로 누설 전류를 차단하는 역할을 한다. D램 공정 미세화로 사용량이 늘어나는 소재다. 현지생산 제품을 삼성전자에 공급할 것으로 알려졌다.
간토덴카공업은 충남 천안 신공장을 가동하기 시작했다. 반도체 공정에서 사용되는 특수가스 황화카르보닐을 생산한다. 해당 공장 내 연구시설도 마련, 고객사 대응력을 높일 계획이다. 그동안 황화카르보닐은 한국에서 생산되지 않았다.
다른 관계자는 “수출규제 이후 불화수소, 폴리이미드 등을 주력하는 일본 업체들이 실적 부진을 겪었다”며 “삼성, SK 등 주요 고객사와의 관계를 이어가 위해 앞으로도 국내로 넘어오려는 일본 반도체 기업이 늘어날 전망”이라고 분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