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합과 경쟁’의 차이…공정위 과징금에 속끓는 ATM업계
“할말은 많지만 참을 수 밖에....”
국내 금융권에 ATM(현금입출금기)를 공급하고 있는 주요 금융자동화기기 업체들의 표정이 묘하게 일그러지고 있습니다.
앞서 4일, 공정거래위원회가 노틸러스효성, LG엔시스, 청호컴넷, FKM 등 4개 ATM공급 업체들이 판매가격과 물량을 사전에 담합한 혐의로 시정명령과 함께 336억원의 과징금을 부과한다고 발표했기 때문입니다. 적지않은 금액입니다.
하지만 ATM업체들은 이날 공정위의 발표 결과에 공식적인 반응을 자제하는 모습입니다. 사실 의외입니다.
그동안 ATM 가격 하락으로 업체들이 수년째 어려움을 호소해 왔던 것이 주지의 사실인데 이날 공정위의 발표는 분명 ATM업계의 현실과 괴리가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경위야 어찌됐건 서슬 퍼런 공정위에 즉각 반발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이 오히려 ‘괘씸죄’에 걸려든다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일까요.
이날 ATM업체들은 공정위가 부과한 과징금 결정에 불복해 소송에 나설지 여부에 대한 입장을 내놓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익명을 요구한 업계 관계자는 이날 공정위의 발표와 관련, 몇가지 문제점들을 지적했습니다.
먼저, 이번 발표와 관련해 “공정위가 지나치게 자신들의 업적을 과시하는 데 치중함으로써 사실 관계를 충분히 반영하지 않은 것 같다”며 매우 못마땅해했습니다.
이날 공정위는 ‘ATM업계의 담합 조사가 시작된 2009년4월 이후부터 2011년 초까지 ATM 가격이 지속적으로 하락했다’고 강조했습니다.
즉, 공정위가 담합조사를 함으로써 당시 3000만원대인 대당 ATM가격이 잡히기 시작했고 2011년에는 1200만원대로 하락했으며, 그것 때문에 ATM의 주 수요처인 금융회사는 물론 이용자인 일반 고객에게게도 혜택이 돌아가게 될 것이라고 설명했습니다. 담합 행위를 조사하면서 비로소 ATM업계가 치열한 시장 경쟁(?)을 시작했다는 것이죠.
보도자료를 곰곰히 살펴 보면, ATM 가격 안정을 위해 공정위의 힘(?)을 제대로 보여줬다는 분위기가 읽혀집니다.
그러나 ATM 업계 관계자는 공정위가 발표한 지난 2009년 3월 당시의 대당 3040만원의 ATM가격은 은행권의 평균가격이 아니라 우정사업본부(우체국금융)의 ATM 도입에서만 예외적으로 적용된 가격이라며 통계의 문제점을 지적했습니다.
공정위가 담합 효과를 강조하기위해 예외적인 수치를 인용했다는 것이죠. (첨언하자면, 당시 우정사업본부를 비롯한 공공기관들은 글로벌 금융위기 여파로 급속하게 냉각된 내수 경기를 살리기 위해 IT예산을 조기에 집행했으며, 또한 시장 가격에 맞는 지출을 했습니다.)
실제로 당시 언론 기사들을 찾아 보면, 우체국금융과는 별개로 은행들은 여전히 대당 2000만원을 밑도는 수준에서 ATM가격이 낮게 형성됐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또 하나 문제점으로 지적되는 것이 있습니다.
이번 공정위의 ATM발표에는 정작 중요한 ATM의 '정상 가격‘에 대한 언급이 구체적으로 없다는 점입니다. 통상적으로 ’정상가격‘이란 제품원가에 시장에서 인용되는 시장 이윤(10% 내외)을 덧붙인 가격입니다.
이 정상가격이 제시돼야만 그것에 근거해 ATM업체들의 '담합에 의한 폭리'가 도대체 어느 정도 였는지를 비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실제 이날 공정위 보도자료에는 ATM업체들이 '폭리'를 취했다는 표현은 없습니다. 담합의 행위는 있었지만 담합의 결과는 없는 모양새입니다.
이러한 기준가격(정상가격)의 구체적인 제시없이 3000만원에서 1200만원으로 ATM기 단가 떨어진 것이 ‘공정위 덕분(?)’이라고만 해버리면, 시장에선 대당 1200만원이 ATM의 정상가격으로 오해할 수 있습니다.
정상가격이 1200만원인데 기존 3000만원을 받았다면 1800만원의 폭리를 취했다는 의미가 됩니다.
그러나 대당 1200만원은 현재 업계가 산정하고 있는 ATM의 정상가격과는 꽤 거리가 있는 가격입니다.
이와 반대로 만약 2000만원이 ATM의 정상가격이라면, 현재 형성된 대당 1200만원은 공정위의 담합조사로 인해 발생한 또 다른 시장 왜곡입니다.
사실 이날 공정위 발표의 문제점, 그리고 핵심은 여기에 있습니다.
왜 그들은 담합을 했는가?
공정위의 표현대로, ATM업계의 가격담합은 2009년 4월 이후로 정말로 깨졌을까요?
ATM업계 관계자는 "가격담합이 실제로 존재했었다는 데는 부분적으로 인정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정말 담합의 성격인지는 따로 논의해야할 문제라고 선을 그었습니다.
실제로 이와 관련해 반드시 고려해야할 사항이 있습니다.
바로 국내 ATM시장의 특수성입니다.
주지하다시피 국내 ATM시장은 4개 업체의 과점 구조로 돼 있습니다. 이들 4개 업체들이 복수로 시중 은행에 제품을 납품합니다. 은행 한 곳에 업체들이 50%, 30%, 20% 를 배분해 공급하는 식입니다.
그러나 이 때문에 ATM업계가 과점 구조라는 것은 결과적으로 잘못된 표현입니다. 1200억원에 불과한‘국내 ATM 시장 규모’를 고려했을때 이들 4개 업체도 숫자적으로는 너무 많습니다. 미시경제학에서나 나오는 ‘독과점의 이윤'이라는 논리의 틀속에 넣을 수는 없어보입니다.
단적인 예로, ATM사업이 거의 주력이라고 할 수 있는 청호컴넷이 최근 몇 년간 지속적으로 적자를 지속하고 있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지난 2000년대 중반, 윙코 닉스돌프라는 독일계 금융자동화기기업체가 국내 시장진입에 실패한 사례도 있습니다. 당시 국내 ATM업계가 폭리를 취했었다면 논리적으로 이 외국계 회사가 진입에 실패할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 간과하지 말아야할 것중 하나는 국내 ATM시장에선 강력한 ‘수요자 독점’이 엄연히 존재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물론 공정위의 권한밖이었겠지만 이러한 ‘수요자 독점’의 상황도 고려했어야하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실제로 ATM의 주 수요처인 은행들은 취약한 국내 ATM업계의 경쟁구조를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ATM입찰시 업체들의 약점을 역이용하는 영악함을 보인지 오래됐습니다.
현재 은행들이 ATM 도입시 시행하고 있는 피말리는 입찰 방식을 보면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비밀이 지켜져야 할 각 은행의 ATM 입찰가격 정보가 수요자들의 필요에 따라 공유됩니다. A은행의 납품 가격은 곧바로 B은행으로 전달되고, 다시 C은행의 도입 기준가격이 되는 식입니다.
이러한 상황을 종합적으로 고려할 때, 공정위가 바라보는 ATM업계의 담합은 그 반대로의 논리로 ‘방어적 담합’이라고 표현할 수 있을지 모릅니다.
‘업계가 공멸할수도 있으니까 어느 (가격)선까지는 물러서지 말자’는 내용을 주제로 ATM업체가 은행권의 입찰에 앞서 사전에 모의를 했다는 그 자체를 ‘담합’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는 시장을 교란하고 폭리를 유지하기 위한 '약탈적 담합'과는 분명히 거리가 있습니다. 결과보다는 내용을 들여다봐야 여유와 아량도 있어야 할 것 같습니다.
단순히 물가안정이 공정위의 역할이라면 이번 담합 조사로 인해 결과적으로 ATM가격은 크게 떨어졌습니다.
그러나 그 떨어진 가격이 누구에게는 정상을 이탈한 비정상가격이며, 또한 공멸에 이를 정도의 과열경쟁으로 내몬 결과라면 얘기는 완전히 달라집니다.
시장의 경쟁은 어디까지나 '공정한 틀' 속에서 이뤄져하며, 거기에서 생성되는 가격만이 시장을 납득시킬 수 있기때문입니다.
결국 이 모든 논란을 잠재우기 위해서는 ATM의 '정상가격' 공개가 무엇보다 필요해보입니다.
참고로 지난 2000년대 중반, ATM업계가 외부 용역을 통해 자발적으로 원가를 공개한 적이 있었는데 그 당시 ATM원가는 2000만원대 초반이었습니다.
[박기록 기자의 블로그= IT와 人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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