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수첩] 글로벌 기업들은 ‘협력’ 외치는데··· 한국 IT 갈라파고스화 ‘심각’
[디지털데일리 이종현기자] 최근 정보기술(IT) 분야 선두 기업들이 던지는 메시지를 자세히 살펴보면 약속이나 한듯 같은 내용을 담고 있다. 바로 ‘협력’이다.
기업들이 협력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은 혼자서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다는 현실 인식에서 비롯한다. 가령 인공지능(AI)과 같은 기술의 경우 AI 서비스를 개발하는 기업, AI를 비즈니스에 적용시키는 기업이 나뉜다. 아무리 좋은 기술이 있더라도 서로 협력하지 않으면 최종 사용자에게 전달될 수 없는 것이 오늘날의 비즈니스 환경이다.
독일 시가총액 1위 기업인 전사적자원관리(ERP) 기업 SAP가 지난 16일부터 17일까지 개최한 자사 연례행사 ‘사파이어2023’의 핵심 메시지 중 하나로 협력은 꺼낸 것도 이 때문이다. SAP는 행사에서 마이크로소프트(MS)와의 협력을 통해 자사 제품에 생성형 AI를 결합한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기업 대 기업간 직접적인 협력 외에, 개방형 생태계를 구축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오는 중이다. SAP와 독일 자동차 기업 주도로 설립된 자동차 데이터 공유 동맹 ‘카테나-X(Catena-X)’가 그 예다. 코로나19,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등으로 촉발한 공급망 위기를 협력해 풀어나가자는 취지다.
이와 같은 협력의 중요성은 사이버보안 업계에서도 강조된다. 지난 4월 개최된 세계 최대 사이버보안 행사 ‘RSA 콘퍼런스 2023(이하 RSAC2023)’는 행사 주제부터가 ‘함께하면 강해진다(Stronger Together)’다. 포티넷, 팔로알토, 트렐릭스, 시스코, IBM 등 내로라하는 기업들이 모두 서로의 데이터를 개방하고 사일로(Silo)를 없애야 한다고 촉구했다.
한국 기업보다 훨씬 규모가 큰 기업들도 경쟁력을 키우기 위해 협력을 외치는 가운데, 한국 IT 분야는 시장 흐름에서 뒤처진 모양새다. 해외 전시회에 온프레미스 기반의 제품을 내놓는다든지, ‘자체 기술’을 강조하면서 다른 기업 제품과는 호환되지 않는다든지 하는 것이 대표적인 예다. 글로벌 표준을 따르기보다는 독자적인 규격을 만들려는 경향이 짙다.
자동차나 스마트폰, 반도체, 조선과 같은 한국이 세계에서도 손꼽히는 기술력을 갖춘 경우라면 전략적 판단에 따라 독자적인 생태계를 꾸리는 것도 유효할 수 있다. 삼성전자나 현대자동차 등이 대표적인 예다.
하지만 소프트웨어(SW)나 사이버보안과 같은 경우 해외에서 통하는 국내 기업이 거의 없다. 이런 상황에서 협력보다는 고립을 택하는 것은 스스로의 성장 가능성을 갉아먹는 행위다.
1990년대 무렵부터 일본을 두고 ‘갈라파고스화됐다’는 표현이 흔히 쓰였다. 시대 흐름에 따르기보다는 독자적인 기술에 몰두했고, 그 결과 산업 전반이 후퇴한 것을 비판적으로 표현하는 말이다. 그리고 이는 현재 한국 IT 환경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일본과 다른 점은, IT 기업들이 고립을 자처하고 있지만 이를 사용하는 기업들은 글로벌화를 지향하고 있다는 점이다. 글로벌 IT 기업들이 앞다퉈 한국에 지사를 설립하는 이유다.
한국 상황에 맞는, 독자적인 기술 개발을 마냥 나쁘다고 할 수는 없다. 하지만 쓰는 사람이 없는 기술에 무슨 의미가 있을까. 산업 발전을 위해 보다 전향적인 개방과 협력을 고민해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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