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지영 칼럼

[취재수첩] ‘전봇대’와 ‘손톱 밑 가시’ 그리고 ‘모래주머니’

백지영
[디지털데일리 백지영기자] # 이명박 전 대통령은 당선인 시절 대통령직인수위원회에서 전남 영암군 대불산업단지를 방문한 경험을 언급한 바 있다. 트레일러가 지나갈 수 있도록 대불산업단지 진입을 가로막는 전봇대를 옮겨달라고 요청했지만 몇 달이 지나도 그대로라는 기업의 불만을 전한 것이다. 이 대통령의 말이 있은 후 놀랍게도 이 전봇대는 3일 뒤 거짓말처럼 뽑혔다. 이후 ‘전봇대’는 이명박 정부의 규제개혁 아이콘이 됐다.

이명박 정부의 ‘규제개혁’ 슬로건이기도 한 ‘규제 전봇대’가 탄생한 일화다. 뒤이어 정권을 물려받은 박근혜 전 대통령 역시 당선인 시절 “중소기업을 살리기 위해선 거창한 정책보단 손톱 밑 가시를 제거해야 한다”며 규제개혁을 강조했다. 문재인 정부 또한 “붉은 깃발을 치우겠다”는 구호로 이를 대신했다.

윤석열 대통령 역시 당선인 시절인 지난 3월 주요 경제단체장들과 함께 한 오찬자리에서 ‘모래주머니’를 꺼내들었다. 기업 활동의 발목을 잡는 규제를 ‘모래주머니’로 규정하고, 관련 규제를 과감하게 철폐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모래주머니를 풀어야 투자와 일자리가 늘고 정부 주도가 아닌 시장 중심의 경제체제로 바꿀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역대정부의 ‘규제개혁’은 그리 성공적이지 못했다. 전국경제인연합회 조사에 따르면, 이명박 정부의 ‘전봇대 규제’만 하더라도 집권 2년 차인 2009년엔 1만2905개였던 규제 숫자는 2012년 1만4889개로 오히려 15.3%나 증가했다.

정보통신기술(ICT) 분야는 ‘규제개혁’을 가장 필요로 하는 곳 중 하나다. 특히 ‘디지털’로 무장한 스타트업들이 대거 등장하면서 기존 전통산업과의 충돌은 계속해서 빚어지고 있다. 대표적인 것이 지난해 이뤄진 ‘타다 금지법(여객자동차운수사업법 개정안)’이다.

11인승 승합차 호출 서비스로 출발한 ‘타다’는 쾌적한 이동 환경과 친절한 기사, 승차거부가 없는 등의 높은 모빌리티 서비스를 제공했음에도 택시업계의 거센 반발에 따라 결국 서비스를 중단해야 했다.

방송과 같이 오랜 역사를 갖고 있는 분야도 규제개선에 대한 논의가 계속되고 있다. 온라인 동영상 서비스(OTT)의 등장 등 미디어 환경은 급속도로 변하고 있지만, 케이블TV 등 유료방송 사업자에 대한 규제는 1995년도에 머물러 있다는 지적이다. 특히 이같은 규제는 여러 부처에 걸쳐져 있어 결국 미디어 거버넌스 개편으로까지 논의가 이어지는 실정이다.

공무원들도 정권이 바뀔 때마다 규제 개혁 대상 찾기에 골머리를 앓는다. 최근 만난 한 부처 공무원은 “정권 초기엔 담당 분야의 규제 개혁 대상 찾기가 통과의례처럼 일상화돼 있다”고 분위기를 전했다. 하지만 막상 규제를 풀었다가 문제가 발생하면 해당 공무원의 책임이 될 우려도 있어 쉽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결국 이 때 필요한 것은 강력한 실행력이다. 아무리 대통령이 규제개혁을 외쳐도 이것이 제대로 실행되지 못하면 탁상행정이 될 수 밖에 없다. 그러면 우리는 또 다음 정권에서 '규제 전봇대'와 '손톱 밑 가시', '모래주머니'를 잇는 새로운 구호를 보게 될 것이다.
백지영
jyp@ddail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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