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수첩] ‘한국형’은 이제 그만
[디지털데일리 백지영기자] 한국형 운영체제(OS), 한국형 인공지능(AI), 한국형 슈퍼컴퓨터, 한국형 드론까지 현재 개발이 진행되고 있는 수많은 ‘한국형’ IT 제품들이다.
지난해 3월 구글 딥마인드의 ‘알파고’가 돌풍을 일으키자 정부는 5년 간 3조5000억원을 투입해 ‘한국형 AI’ 개발을 추진한다고 밝혔다. 하지만 업계의 반응은 냉랭했다. 지금까지 정부가 주도로 벌인 ‘한국형’ 혹은 ‘K-XXX’ 사업은 대부분 실패했기 때문이다. 때문에 ‘한국형’이라는 이름이 붙으면 오히려 부정적인 느낌이 강해지는 것도 사실이다.
이같은 ‘한국형’은 최근 슈퍼컴퓨터 분야에도 적용되고 있다. 지난 27일 과학기술정보통신부가 발표한 ‘제2차 국가초고성능컴퓨팅(HPC) 육성 기본계획’에는 2018년부터 2022년까지 핵심기술의 국산화를 통해 페타스케일급 슈퍼컴퓨터를 위한 자체기술로 개발하겠다는 내용이 포함돼 있다.
페타스케일은 페타플롭의 규모가 가능한 시스템이다. 1페타플롭(PF)은 1초에 1000조번 이상의 연산이 가능한 수치다. 현재 세계에서 가장 빠른 슈퍼컴퓨터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중국 선웨이 타이후라이트가 93PF으로 1초에 93경번의 연산을 할 수 있다.
사실 정부는 지난해 4월에도 2025년까지 10년 간 매년 100억원을 투입, 총 1000억원으로 30PF 성능 이상의 ‘한국형 슈퍼컴’을 만들겠다는 계획을 밝힌 바 있다. 이 역시 알파고와 이세돌 9단의 바둑경기 직후 발표된 것으로, 발표 직후 “알파고보다 몇배 빠른 한국형 슈퍼컴 개발”과 같은 자극적인 헤드라인이 붙었었다.
이번 제2차 기본계획에서는 하드웨어(HW)와 시스템 소프트웨어(SW) 영역에서 국산화가 가능한 부분을 선정해, 개발한다는 방침을 세웠다. HW는 한국과학기술정보원(KISTI)이 맡았고 시스템 SW 개발은 지난해 설립된 고성능컴퓨팅(HPC) 사업단이 진행한다. 2022년까지 약 300억원의 예산이 투입될 예정이다.
과기부 괸계자는 지난 27일 진행된 공청회에서 “90년대 중반 추진된 ‘타이콤 프로젝트’ 이후 국가적으로 컴퓨터를 개발하려는 시도가 거의 없어지면서 관련 분야 기술 개발이 지연됐다”며 자체 슈퍼컴퓨터 개발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현재 슈퍼컴퓨터는 국가의 미래 경쟁력을 가늠할 수 있는 중요한 지표로 각 국가가 매 6개월마다 발표되는 순위를 두고 자존심 경쟁을 벌이고 있다. 순위 자체보다 더 중요한 것이 슈퍼컴퓨터의 활용이다. 그나마 이번 2차 기본계획에선 슈퍼컴을 통해 국민 삶의 질 향상을 위한 국가사회 현안 문제를 해결하는데 초점을 맞추겠다고 내용이 포함됐다.
하지만 슈퍼컴퓨터를 포함해 IT분야의 계속되는 ‘한국형’ 타령은 이제 그만했으면 한다. 혈세를 낭비하면서 매번 한국형 사업이 실패로 끝나는 이유는 무엇일까.
아마도 특정 현안이 떠오를 때마다 정부 주도로 몇 개년의 추진계획을 뚝딱 만들어내고 예산을 배정하는 탁상행정에 있지 않을까. ‘알파고’가 유행하자 ‘한국형 알파고’, 포켓몬이 뜨자 ‘한국형 포켓몬’과 같은 이름을 붙이고 그저 유행을 따라가는데 급급하다보니 이같은 졸속정책이 나올 수 밖에 없다.
최근 4차산업혁명과 같은 키워드가 또 다시 뜨면서 IT분야는 그 어느 때보다 빠른 변화를 겪고 있다. 새로운 기술과 서비스가 하루가 멀다하고 생겨나고, 이에 맞춰 또 다른 ‘한국형’이 등장할 것으로 예상된다. 새해에는 새로운 시대에 걸맞는 새로운 정부의 역할, 정책을 기대한다. ‘한국형’ 쇼는 그만돼야 한다.
<백지영 기자>jyp@ddail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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