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데일리 박현영기자] 가상자산 거래소, 지갑 업체 등 가상자산사업자(VASP)의 영업 여부를 사실상 은행이 결정짓는 특정금융정보법(특금법) 시행령 개정안이 입법예고됐다. 이에 대해 가상자산사업자들은 은행이 투명하게 기준을 공개해야 한다는 입장인 반면, 은행은 기준을 마련하는 것 자체가 부담이라는 입장이라 적잖은 혼란이 예상된다.
2일 금융위원회 금융정보분석원(FIU)은 ▲가상자산사업자 및 가상자산의 범위 ▲신고 서류 및 절차 ▲실명확인 입출금 계정의 개시 기준 ▲가상자산 이전시 정보제공 대상 기준 등을 담은 시행령 개정안을 입법예고했다. 개정안의 핵심은 ‘누가 가상자산사업자에 해당하는가’와 ‘가상자산사업자가 영업하려면 어떤 요건을 충족해야하는가’다.
가상자산사업자에는 거래소, 커스터디(수탁) 업체, 지갑 업체 등이 포함된다. 원화 입출금을 지원하려는 가상자산사업자는 은행으로부터 실명확인 입출금계좌를 발급받아야 하는데, 발급을 위해선 다음과 같은 요건을 충족해야 한다.
①고객 예치금을 분리 보관할 것 ②정보보호 관리체계(ISMS) 인증을 획득할 것 ③신고 불수리 요건(벌금 이상 형 선고 후 5년 경과 이전)에 해당하지 않을 것 ④고객 거래내역을 분리 관리할 것 ⑤금융회사(은행)는 가상자산사업자가 자금세탁행위 방지를 위해 구축한 절차·업무지침을 확인해 금융거래 등에 내재된 자금세탁행위의 위험을 식별·분석·평가해야 함
이 때 잡음이 예상되는 요건이 5번 요건이다. 가상자산사업자의 자금세탁방지 위험을 은행이 평가해야 하므로, 사실상 은행이 가상자산사업자의 운명을 결정짓는 셈이다.
단 원화 입출금을 지원하지 않을 경우 실명계좌가 없어도 ISMS 등 특금법 상 다른 의무만 준수하면 된다. 따라서 실명계좌 없이 사업하려면 원화 입출금을 포기하면 되지만, 이 같은 방식은 사실상 수익성이 없다. 가상자산 입출금만 가능한 거래소를 쓰려면 다른 거래소에서 해당 거래소로 비트코인(BTC) 등 가상자산을 옮겨야 하므로, 불편함이 큰 탓이다.
◆실망한 가상자산사업자들 “2018년과 다를 바 없어…진입장벽만 높아져”
이에 대해 가상자산사업자들은 정부가 가상자산 거래실명제를 처음 도입했던 2018년 1월과 다를 바 없다는 입장을 보였다. 당시 거래실명제에 따라 빗썸, 업비트, 코인원, 코빗은 은행으로부터 실명계좌를 발급받았지만 나머지 거래소들은 발급받지 못했다. 이후 은행들이 실명계좌를 터주지 않으면서 4개 거래소만 발급받은 상태로 2년 넘는 시간이 흘렀다.
한 가상자산 거래소 관계자는 “1번부터 4번까지 요건은 사업자의 힘으로 충족할 수 있는 요건이지만 5번 요건은 사업자가 할 수 없는 일”이라며 “결국 은행이 결정하는 예전 거래실명제와 다를 바가 없다”고 말했다. 또 다른 거래소 관계자도 “ISMS 인증은 대부분 거래소가 진작 준비하고 있었다”며 “시행령에선 실명계좌 발급 기준이 구체적으로 명시돼있을줄 알았다”고 아쉬움을 전했다.
입법예고된 개정안대로 시행될 경우, 가상자산사업자들은 은행이 투명하게 평가 기준을 공개했으면 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한 거래소 관계자는 “만약 은행이 실명확인 계좌를 터주지 않을 경우 그에 알맞은 이유라도 밝혔으면 한다”며 “그래야 특금법 시행이 유의미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가상자산사업자들의 합법적인 영업행위를 위한 법이라면, 적어도 어떻게 합법적으로 영업할 수 있는지는 설명돼야 한다는 지적이다.
가상자산 거래소 코어닥스의 임요송 대표도 “거래소를 운영하는 입장에서는 시장의 허들이 한층 더 높아진 셈이라며 “이번 시행령이 자금세탁방지라는 본래의 취지에 부합하기 위해서는 은행이 실명확인 입출금 계좌를 발급 여부를 판단하는 절차가 투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주저하는 은행 “수익보다 리스크 클 수 있어”
문제는 은행들이 평가 행위 자체를 부담스러워한다는 점이다. 자금세탁방지 시스템을 평가하면서까지 가상자산사업자들을 고객으로 유치하는 게 이득일지 검토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시중은행 관계자는 “자금세탁방지를 평가하는 것 자체가 은행에게는 리스크”라며 “은행도 영리기업이다 보니 리스크를 감수하면서 얻는 이익이 큰지 판단하는 과정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어 “가상자산 거래소들을 고객으로 유치하면 수익은 발생하겠지만, 자금세탁 가능성으로 인한 리스크가 너무 크기 때문에 은행 입장에선 주저하는 게 사실”이라고 설명했다.
금융정보분석원(FIU)은 은행 등 금융회사에 결정을 강요한 것이 아닌, 금융회사의 의무를 재확인했을 뿐이라는 입장이다. FIU 측은 “금융회사에 가상자산사업자의 자금세탁방지 현황을 확인하도록 한 것은 금융회사에게 새로운 의무를 부과한 것이 아니”라며 “금융회사가 고객의 자금세탁 위험을 식별 및 분석하도록 한 특금법 상 고객확인 의무를 재확인한 것”이라고 밝혔다.
◆아직 입법예고 기간…한국블록체인협회 “의견 전달 예정”
우선 거래소들은 입법예고된 개정안이 확실시될 때까지 기존에 준비하던 사항들을 이어갈 방침이다.
이미 ISMS 인증을 획득한 고팍스 측은 “시중은행과 소통하던 것을 바탕으로 우선 상황을 기다릴 계획”이라고 전했다. 코어닥스 관계자는 “현재 ISMS-P 인증 획득을 목표로 실사를 진행하고 있다”며 “우선 ISMS 인증을 획득해 특금법에 협조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거래소 등 가상자산사업자로 이루어진 한국블록체인협회는 40일의 입법예고 기간 동안 사업자들의 입장을 의견서로 제출할 계획이다. 협회 관계자는 “시행령이 나오기 전부터 협회의 입장을 꾸준히 전달하고 있었다”며 “아직 완전히 조문화된 것은 아니기 때문에 필요 시 추가 의견서를 마련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FIU는 오는 3일부터 12월 14일까지 40일 간 의견서를 받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