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수첩] 관대한 실패가 혁신의 원동력
[디지털데일리 이수환기자]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라는 말이 있다. 쓰라린 경험이 성공의 밑거름으로 작용할 수 있다는 얘기다.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실패라는 두려움을 극복할 수 있을 때 가능한 일이다. 사회가 실패에 관대한 시선을 보일 수 있을 정도로 성숙함을 보여야 함은 물론이다.
벤처 열풍의 원조인 미국 실리콘밸리는 반세기가 훌쩍 넘은 시간 동안 수많은 기업이 만들어지고 사라졌으며 그만큼 성공과 실패가 공존하는 세상이다. 연간 매출 46억달러(약 5조3000억원)을 훌쩍 넘기는 실적을 기록한 엔비디아도 실리콘밸리에서 태어났는데, 지금이야 팹리스 기업 가운데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히지만 처음 사업을 시작한 1993년에는 무명에 불과했다. 더구나 1997년까지 연달아 제품이 실패하면서 숱한 위기를 겪었다.
엔비디아는 젠슨 황, 크리스 말라코우스키, 커티스 프리엠이 공동으로 창업했다. 그들은 향후 PC에서 3D 그래픽이 가장 중요한 핵심요소로 떠오를 것을 예감하면서 관련 기술을 강조한 그래픽 칩을 설계했다. 당시만 하더라도 그래픽 칩 시장은 ATI, IBM, SiS, 트라이던트, 3D랩스, 매트록스, 시러스로직 등 다양한 업체가 각축을 벌이고 있었다. 신생 업체인 엔비디아는 코드명 ‘NV1’이라는 3D 가속기를 사운드카드로 유명한 크리에이티브랩스를 통해 선보였지만 시원하게 실패했다. 2D 그래픽카드를 보유하고 있는 상황에서 3D 게임을 하기 위해 값비싼 3D 가속기를 따로 구입할 사용자가 적었고 각종 버그와 함께 지원하는 소프트웨어가 변변치 못했기 때문이다.
희망적인 것은 콘솔 게임기인 소니 플레이스테이션이 폭발적인 인기를 끌면서 3D 게임에 대한 인식이 크게 달라졌다는 사실이다. PC에서도 콘솔 게임기 못지않은 3D 그래픽을 구현하기 위해서는 3D 가속기가 필수적이었고 이를 바탕으로 3Dfx라는 기업이 새롭게 떠올랐다. 이때까지만 하더라도 엔비디아는 전혀 주목을 받지 못했다.
기회는 곧바로 찾아왔다. 당시 3D 가속기는 앞서 말한 것처럼 2D 그래픽카드를 필요로 했지만 엔비디아는 2D와 3D를 그래픽 칩(리바128)에 집적했다. 하나의 그래픽카드로 2D와 3D 그래픽을 모두 구현할 수 있다는 점에서 호평 받았다. 경쟁자의 등장으로 잔뜩 긴장한 3Dfx도 관련 제품을 부랴부랴 출시했으나 직영판매만을 고집해 스스로 무너지고 말았다. 이후 엔비디아에 인수합병(M&A)되며 역사에서 사라졌다.
리바128의 성공에 고무된 엔비디아는 리바TNT, 리바 TNT2를 잇따라 성공시키며 일약 그래픽 칩 업계의 다크호스로 떠올랐다. 급기야 1999년 지포스256을 선보이면서 그래픽처리장치(GPU)라는 개념을 정착시켰다. GPU 업계의 인텔이나 다름없었다. 이처럼 엔비디아가 시장에서 주목받기까지는 4년이 넘는 시간이 필요했는데 트렌드를 먼저 앞서 내다봤다는 점도 주효했지만 무엇보다 실패 속에서 새로운 희망을 찾아냈다는 사실이 가장 컸다. 젠슨 황 최고경영자(CEO)도 인터뷰에서 조직 내 ‘창의성’을 수차례 강조하며 ‘실패를 수용하는 문화’의 필수성을 역설한바 있다. 엔비디아는 그 누구보다 실패하는 법을 잘 가르친다는 말도 했다.
실리콘밸리와 마찬가지로 우리나라도 벤처 열풍이 강하게 불었고 지금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예나 지금이나 실패에 크게 관대하지 못한 문화는 여전한 것 같다. 얼마나 투자금을 받아내고 발 빠르게 상장하느냐에 목이 말라있다.
국내 팹리스 업계는 상황이 더욱 나쁘다. 좁디좁은 내수 시장에 발목이 붙잡혀 대기업에 지나치게 종속적이다. 물론 관련 기업이 성장하지 못하는 데는 정부의 지원부족부터 기초적인 사업 토양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이유가 있다. 실패에 대한 두려움으로 해외 진출이 적극적으로 이뤄지지 못하는 것도 원인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국내 대기업에 제품을 공급할 정도라면 전 세계 어디에서라도 충분히 경쟁력이 있다는 것을 발판삼아 적극적인 해외진출과 M&A를 고려하는 업체가 주목받고 있다는 점에서 생각을 달리할 필요가 있다.
국내에서도 엔비디아 같은 기업이 나오지 못하리라는 법은 그 어디에도 없다. 다만 이런 기업이 만들어지기 위해서는 실패에 대해 관용적인 자세와 함께 긍정적인 부분을 키워주기 위한 제도적 장치가 충분히 마련되어야 한다. 중장기적으로 우리나라만의 팹리스 육성풍토 발굴이 필요한 시점이다.
<이수환 기자>shulee@ddail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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