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가기고] 규제의 역설: AI 기본법이 혁신을 저해하는 이유
전 세계가 인공지능(AI) 혁신을 향해 질주하는 가운데, 각국 정부는 AI 정책의 방향성을 두고 중요한 결정을 내리고 있다.
미국과 중국은 AI 산업을 전략적으로 육성하며 경쟁력을 강화하는 데 집중하고 있는 반면, 한국은 규제 중심의 접근을 통해 AI의 위험을 통제하려 하고 있다. 하지만 혁신의 시대에 과도한 규제는 오히려 국내 AI 기업의 경쟁력을 저해하고 기술 발전을 위축시킬 수 있다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AI 기술은 경제성장의 새로운 원동력이자 국가 경쟁력의 핵심 요소로 자리 잡고 있다. 예컨대 미국은 '스타게이트 프로젝트'를 통해 향후 4년간 AI에 5000억 달러(약 729조원)를 투자하겠다고 발표했고, 프랑스는 1090억유로(약 163조원)의 민간투자 유치 계획을 내놓았다. 중국 역시 정부 주도로 AI 산업을 적극 지원하며 딥시크와 같은 혁신 기업을 배출하고 있다.
즉, 세계 각국이 규제보다 투자와 진흥에 방점을 두고 AI 패권 경쟁을 가속화하는 가운데, 한국은 2026년 1월부터 시행 예정인 'AI 기본법'을 통해 규제 체계를 갖추는 데 주력하고 있다.
한국의 AI 기본법에서 가장 큰 문제점으로 지적되는 것은 '고영향 AI'라는 개념의 불명확성이다. 법은 "인간의 생명, 신체 안전 또는 기본권에 중대한 영향을 미치거나 위험을 초래할 우려가 있는 AI 시스템"을 고영향 AI로 정의하고 있는데, 이 정의는 너무 광범위하고 해석의 여지가 크다.
정부는 유럽의 AI Act를 참고했다고 주장하지만, 실상은 매우 다르다. 유럽연합의(EU)의 AI Act는 금지된 AI, 고위험 AI, 제한된 위험, 최소 위험의 네 가지 범주로 AI 시스템을 명확히 분류하고, 각 범주별 구체적인 기준과 요구사항을 상세히 규정했다. 특히, 고위험 AI의 경우 중요 인프라, 교육, 고용, 필수 서비스, 법 집행 등 구체적인 적용 분야를 명시하고 있다.
반면, 한국은 '고위험(High-Risk)'이라는 표현이 부정적 의미를 담고 있다는 이유로 '고영향(High-Impact)'이라는 용어를 선택했지만, 정작 규제 내용은 부정적 영향만을 전제로 하고 있다. '영향'이라는 단어는 본래 긍정적 영향과 부정적 영향을 모두 포함할 수 있음에도, AI가 가져올 수 있는 긍정적 효과는 배제한 채 위험성만 강조하는 모순적인 규제 프레임워크가 구축되고 있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중대한 영향'이라는 기준의 모호성이다. 법에 따르면 대출 심사, 채용 등이 고영향 AI의 예시로 제시됐지만, 구체적인 판단 기준은 시행령에 위임된 상태다. 이는 AI가 의사결정의 일부만 담당하는 경우에도 고영향 AI로 간주될지, 어느 정도의 영향력을 '중대'하다고 볼 것인지 등 핵심적인 질문들에 대한 답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이러한 법적 불확실성은 기업들로 하여금 혁신적인 시도보다는 안전한 선택을 하게 만든다. 예컨대, 금융권에서는 AI를 활용한 신용평가 모델을 개발하려 해도, 이것이 '고영향 AI'로 분류될 경우 감수해야 할 규제 부담과 책임 리스크가 크기 때문에 개발을 주저하게 될 수 있다. 특히 기업들은 시행령이 마련될 때까지 불확실성 속에서 전략을 수립해야 하는 어려움에 직면하게 된다.
또한, 한국의 고영향 AI 규제는 금융, 의료, 교육 등 분야별 특수성을 고려하지 않은 일률적인 접근법을 취하고 있다. 이는 이미 각 산업에 존재하는 규제와 중복되거나 충돌할 가능성을 증가시키며, 기업들이 분야별로 다른 규제 요구사항을 모두 충족해야 하는 부담을 가중시킨다.
EU가 고위험 AI의 범위를 명확히 하고 단계적 시행 일정을 통해 기업들에게 준비 기간을 제공하는 것과 달리, 한국의 AI 기본법은 모호한 규정만 두고 시행령에 중요 사항을 미루면서 기업들에게 불확실성의 부담을 지우고 있다. 더욱이 정부는 AI 진흥을 위한 대규모 투자나 지원 계획은 미비한 상황에서 규제 체계만 서둘러 갖추고 있어 산업계의 우려를 키우고 있다.
국제 경쟁력 측면에서도 한국 기업들은 불리한 위치에 놓일 수 있다. 미국과 중국 기업들이 비교적 자유로운 환경에서 AI 기술을 발전시키는 동안 한국 기업들은 불명확한 규제 속에서 자가 검열을 하며 혁신의 속도를 늦출 수밖에 없다. AI 개발에서 시간과 속도가 핵심 경쟁력인 상황에서 이는 한국이 AI G3 도약을 꿈꾸기 어렵게 만드는 요소다.
더욱 놀라운 것은 한국의 규제 중심 접근법이 유럽이 이미 후회하고 있는 길을 따르고 있다는 점이다. 프랑스의 마크롱 대통령은 "유럽은 AI 경쟁에서 뒤처져 있다"고 인정하면서 "미친 규제를 없애야 한다"고 발언했다. 네덜란드의 기업 버드(Bird)는 "AI 기술 혁신에 필요한 환경이 부족하기 때문"이라며 유럽을 떠나는 등 유럽 내에서도 규제 중심 접근의 한계가 명확히 드러나고 있다.
한국이 진정으로 AI 강국을 목표한다면 고영향 AI에 대한 명확한 기준과 범위를 설정하고, 산업별 특성을 고려한 유연한 규제 체계를 마련해야 한다. 위험 수준에 따른 차등적 규제와 함께 AI 발전의 긍정적 측면을 촉진하는 정책적 지원이 병행되어야 한다.
결국, AI 기본법은 혁신을 촉진하기보다는 기술 발전을 위축시키는 요소로 작용할 가능성이 크다. 특히 '고영향 AI'라는 모호한 개념은 기업들에게 법적 불확실성을 안겨주고, 혁신적 시도보다는 보수적 접근을 택하게 만든다. 금융, 의료, 교육 등 분야별 특수성을 고려하지 않은 일률적인 규제는 이미 존재하는 산업별 규제와 중복되어 기업들의 부담을 가중시킬 수 있다.
기술 혁신을 장려하기 위해서는 규제 준수를 위한 복잡한 절차를 간소화하고, AI 발전의 긍정적 영향을 고려한 유연한 규제 체계를 마련해야 한다. 스타트업과 중소기업이 초기 비용 부담과 법적 위험으로 인해 시장 진입을 포기하지 않도록 지원 정책도 병행해야 한다.
"절박하고 중차대한 시기에 서 있다. 한국 기업이 글로벌 경쟁에서 앞서갈 수 있도록 국내 기업을 대상으로 하는 규제보다는 AI 산업 진흥을 위한 관심을 가져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최수연 네이버 대표의 이 발언은 현 상황에 대한 산업계의 절박함을 대변한다.
AI G3 도약을 위해 한국이 선택해야 할 길은 명확하다. 규제로 AI 산업을 옥죄기보다는, 민간 주도의 혁신을 지원하는 방향으로 정책을 설계해야 한다. 미국과 EU의 사례에서 교훈을 얻어야 한다. 규제가 강할수록 AI 산업의 발전이 저해된다는 사실을 직시하고, 진흥 정책을 통해 기업들이 글로벌 무대에서 경쟁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AI는 더 이상 선택이 아닌 생존의 문제다. 한국이 AI 강국으로 도약하기 위해, '규제보다는 지원'이 필요한 시점이다. 모호한 '고영향 AI' 개념으로 국내 기업들의 발목을 잡기보다, 명확한 기준과 적극적인 혁신 지원을 통해 한국 AI 산업이 세계 무대에서 경쟁력을 갖출 수 있도록 정책의 방향을 재설정해야 할 때다.
유성진 숭실대학교 경영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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