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KT 40년] ⑦ ‘단 한번의 끊김 용납 안돼”…故 서정욱, 세계 최초 ‘CDMA’ 광명
전세계 내노라 하는 이동통신사들이 총출동하는 스페인 바르셀로나 모바일월드콩글레스(MWC)에서 올해도 SK텔레콤은 메인홀 중심에서 우리나라 정보통신기술(ICT)을 글로벌에 전파하고 있습니다. 올해로 40주년을 맞이한 SK텔레콤은 국내 1위 이통사를 넘어, AI 컴퍼니로 또 다른 패러다임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이 자리를 빌어 과거 40년을 조망해보고 미래 ICT 개척자로서 SK텔레콤의 비전을 살펴봅니다. <편집자주>
[디지털데일리 김문기기자] 올해 초 안타까운 소식이 전해졌다. 우리나라 세계 최초 CDMA 신화를 일궜던 서정욱 장관이 지난 1월 11일 세상을 떠났다. 우리나라 정보통신의 국산화에 일조한 기술자이자 위기 때마다 이를 극복해낸 인재이기도 하다. 한국이동통신(현 SK텔레콤) 사장과 부회장, 과학기술부(현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차관과 장관을 지냈고, 여러 대학에서 인재 양성에 힘을 보탰다. 이 자리를 빌어 그분의 노고와 헌신에 경의를 표한다. SK텔레콤 40주년을 맞이한 올해, 故 서정욱 장관의 이야기를 시작해본다.
다시 한번 더 오른 고행의 길
제2이통사가 출범하기 전인 1992년 12월 3일 우여곡절 끝에 CDMA가 국내 이동통신 단일 표준화 기술로 확정된다. 1993년 2월에는 대전에서 ETRI와 퀄컴이 공동개발한 CDMA 이동통신시스템의 예비 성능 시험에 성공하고, 서울지역 성능시험도 4월에 마무리했다. 상용화 계획은 당초 1997년에서 1995년으로 앞당겨졌다.
다만 상용화시기가 앞당겨지면서 기업들의 고민은 더 깊어졌다. 정부가 내놓은 로드맵에 현실적으로 맞출 수 없다는 것. 그러다보면 자연스럽게 외산장비들이 들어올 것이며, 퀄컴에게 지불되는 로열티 부담도 심해질 것이라 우려했다. 그러다보니 정부는 CDMA 사업을 민간과 연결할 수 있는 고리를 만들어야 했다.
이같은 니즈에 입각해 이동통신개발관리사업단이 신설됐다. 또한 사업단은 전전지교환기 국산화를 이끈 바 있는 서정욱 단장에게 맡겼다. 1993년 9월 16일 한국이동통신 소속으로 서울 종로구 이마빌딩에 현판식이 열렸다. 전파통신기술개발 사업에 대한 체신부 장관 자문기구인 ‘전파통신기술개발추진협의회’도 이날 발족했다. 의장은 서정욱 단장이 겸임했다.
서정욱 단장의 각오는 대단했다. 서정욱 단장이 집필한 ‘미래를 여는 사람들’ 서적을 살펴보면, 서 단장의 당시 각오를 엿볼 수 있다.
"어떻게 해서라도 1995년 말까지는 CDMA 시스템을 상용화해야 하는 것은 당위가 되었지만, 당시의 처지로는 도저히 국산 시스템으로 이동통신 서비스를 제공한다는 것이 불투명해진 상태였다. 만약 차질이 생겨 신규사업자의 서비스 개시가 늦어지고, 그로 인해 적체가 심화되거나 통상마찰로 비화될 경우 그에 대한 책임은 차치하더라도 엄청난 투자 낭비는 물론 장비 도입 과정에서의 불이익이나 외화 부담을 면하기 어려웠다. 이를 심각하게 생각한 정부는 다각도로 대책을 강구하던 끝에 TDX의 개발 사례를 되새기면서, 그 사업에 앞장섰던 나에게 다시 한번 CDMA라는 고행의 길을 걷게 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TDX 개발보다 CDMA 위험부담이 훨씬 큰 개발 사업이었다. 번번이 극적인 결단을 내려야 하는 나의 입장은 로버트 프로스트의 '가지 않은 길'을 종종 되새기게 했다.”
발상의 전환, 장비 자율경쟁의 시작
냉정하게도 각오와 현실은 달랐다. 이 때 미국 이동통신 시장에서 경험이 있었던 이성재 한국이동통신 부장이 새로운 아이디어를 제안했다. 1988년 미국 이동통신사업자협회가 디지털 이동전화 도입 시 ‘사용자 요구사항’을 제시한 점에 주목했다. CDMA 시스템 개발에 대한 기준을 명확하게 제시하고, 기업은 이 기준에 부합하는 제품을 제작해 업계 상관없이 채택한다는 방법이었다.
예를 들어 정부가 특정 크기와 특정 무게, 특정 성능 등을 기준으로 삼으면, 그에 맞춰 제작이 이뤄진다면 성능검증을 통해 수주하는 방식이다. ‘연구소 주도의 공동개발’에서 ‘업체 간 자율경쟁 개발’로 패러다임이 전환되는 순간이었다.
해를 넘긴 1994년, 선경그룹이 한국이동통신을 품게 되면서 CDMA 개발 속도는 더 가속화됐다. 비용뿐만 아니라 사업관리단이 준비 중이었던 사용자 요구사항에 대해서도 함께 머리를 맞댈 수 있게 됐다.
이에 따라 같은해 8월 개발업체들을 대상으로 108가지 항목에 대한 예비시험이 실시됐다. 사업관리단은 선경그룹과 함께 서울 장안동 연구실에서 이동통신 시스템과 단말기, 기지국 상태 등을 점검할 수 있는 시험장비를 마련했다. 그 결과 삼성전자와 현대전자가 예비시험을 통과했다. 탈락한 LG정보통신에게는 재시험 기회를 부여했다.
또한 ETRI와 퀄컴이 공동 추진한 CDMA 방식 디지털 이동전화 시스템 개발도 마무리됐다. LG정보통신과 삼성전자, 현대전자, 맥슨전자가 단말 개발을 서둘렀다.
한국이동통신은 11월 11일 제안요청서를 발송한 이후 1994년 11월 15일 세계 최초로 CDMA 방식 시스템 운용 시험에 성공했다. 이 기세를 몰아 한국이동통신은 서울 장안동 집중운용보전센터에 3대의 교환기를 설치하고 구역을 나눠 CDMA 상용시험에 착수했다.
1995년 예비시험을 모두 치른 CDMA는 상용망과의 연동에 나섰다. 아날로그 주파수 대역에 CDMA 운용 주파수를 뽑아내야 하는 어려운 작업이었다.
당시 실제 현장은 이랬다. 기존 기지국 서비스를 중단해야 했기 때문에 매일 오후 10시부터 다음날 새벽 6시까지만 작업이 가능했다. 문제는 작업에 나선 이들이 한국이동통신 직원만 있는 것이 아니라 해외업체 직원들도 포함돼 있었다. 사공도 많은데 말도 안통하는 것. 시간 제한이라는 변수까지 부여됐다. 당시 경험자들에 따르면 딱 ‘전쟁’ 그 자체였다.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
그 후 1995년 3월.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서정욱 사업관리단장은 한국이동통신 대표로 선임됐다. 서 단장이 이끌던 개발사업단은 한국이동통신 소속 디지털사업본부로 전환됐다. 서 대표 취임으로 한국이동통신은 전사적으로 CDMA에 올인하는 조직으로 재편됐다.
하지만 위기는 또 다시 찾아왔다. 1994년말 문민정부로 전환되고, 정부조직법이 개정되면서 그간 정보통신분야를 이끌었던 체신부를 뒤로 하고 ‘정보통신부’가 신설되면서 이어졌던 ‘2차 통신사업구조 개편안’ 때문이었다. 그 중에서도 개인휴대통신(PCS)’에 많은 관심이 쏠렸다. PCS 사업권을 따낸다는 건 곧 ‘제3이동통신사’가 출범한다는 의미였기 때문이다. 정보통신부는 6월 30일 이 방안을 최종 확정했다.
‘개인이 언제 어디서나 이동전화를 쓸 수 있다’는 개념의 PCS를 구현하기 위해서는 실제 구현을 위한 기술방식이 있어야 한다. 주요 후보군이 바로 한국이동통신이 추진하고 있는 ‘CDMA’와 전세계적으로 상용화된 바 있는 시분할다중접속방식(TDMA)’이다. 한국이동통신, 신세기통신과는 달리 후발주자였던 한국통신과 데이콤은 차별화를 위해 TDMA를 밀어 붙였다.
한국이동통신 입장에서는 속이 타 들어갔다. 현재 상용화를 추진 중인 CDMA가 PCS 표준으로 자리 잡아야만 미래를 담보할 수 있었다. 만약 TDMA가 표준이 된다면 더 큰 규모의 형님기업인 한국통신과 데이콤에 시장을 내줄 것이 불보듯 뻔했다.
PCS 표준으로 CDMA가 선택되기 위해서는 꼭 풀어야할 숙제가 있었다. TDMA는 CDMA 대비 기술적으로 뒤쳐져 있기는 하나 전세계 범용성을 보유하고 있었다. 즉, 상용화 사례가 주위에 널려 있었다. 이에 비해 CDMA는 기술력은 높지만 상용화된 사례가 없었다. 한마디로 CDMA가 표준이 되기 위해서는 그 성능을 직접 경험시킬 필요가 있었다.
그 과정에서 서정욱 대표가 승부수를 던졌다. 서울 삼성동 코엑스에서 열리는 '95 정보통신 전시관 행사'에서 CDMA 시연회가 열리기에 앞서 취재를 위해 서울 광화문 정보통신부에서 셔틀버스에 오르는 기자들을 대상으로 이동하는 차량에서 CDMA 시스템 기반의 통화 경험을 제공하겠다는 전략이었다. 이동하는 차량에서 끊김 없는 통화가 가능하다면 실제적 불확실성을 줄임과 동시에 전국적으로 CDMA의 우수성을 널리 알릴 수 있는 기회였다.
다만, 이같은 전략은 실패 없는 성공만을 염두에 둔 카드였다. 만약 실패한다면 CDMA는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널수도 있었다.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 한국이동통신 직원들은 그 자리에서 비명을 지를 수밖에 없는 결단이었다.
한 번의 끊김도 없었다…CDMA 쾌거
“당신, 한달동안 집에 코빼기도 안보이고, 혹시 딴 살림 차린거 아냐!”
“죄송합니다. 서정욱입니다. 부군은 그렇지 않습니다. 열심히 일하고 있습니다.”
각색이 있기는 하나 실제로 있었던 사례로 알려져 있다. 서울 광화문에서 삼성동 코엑스까지 가는 모든 길의 시설을 하나하나 꼼꼼히 점검해야 했던 직원들은 새벽까지 이어지는 통화불량 버그 제거는 물론이거니와 사장의 거센 채찍질까지 더해 사경을 해멜 지경이었다. 퇴근도 제대로 할 수 없다보니 가정에서도 오해와 불만이 쌓였다. 실제 서 대표가 이를 진화하기 위해 각 직원의 가정에 전화를 돌렸다는 일화가 전해지기도 했다. 그만큼 한치의 실수도 용납될 수 없었다.
마침내 기자들을 대상으로 CDMA 시연회가 열리는 1995년 6월 12일의 날이 밝았다.
약속대로 기자들이 서울 광화문 정보통신부에서 서울 삼성동 코엑스로 가는 셔틀버스에 올라탔다. 미리 대기해 있던 서정욱 사장 역시 승용차에 탑승해 셔틀버스를 인도했다. 무사히 출발한 두 대의 차량은 광화문을 지나 용산구 하얏트호텔을 지났다. 그리고 승용차로부터 셔틀버스로 통화가 시도됐다.
영겁의 시간, 한국이동통신으로서는 코엑스로 향하는 그 시간만큼 절박한 상황이 또 있을까 싶었다. 한 번의 끊김만으로 나락에 떨어질 수 있기에 초단위로 쿵쾅대는 가슴을 틀어잡아야 했다. 물론 시간이 흐를수록, 목적지에 다다를수록 불확신은 서서히 확신으로 바뀌었고, 지옥문에서 천국을 향한 도로로 전환했다. 승용차와 셔틀버스는 목표했던 코엑스에 무사히 당도했다. 결과는 대성공. 이 둘의 CDMA 통화는 단 한 번의 끊김도 없었다.
전시장에서 진행된 시연회도 성공적으로 마무리됐다. 경상현 정보통신부 장관은 코엑스 3층 전시관에서 전시장 주위를 돌고 있는 차량 탑승자와 CDMA 방식의 디지털 이동전화기를 이용한 통화에 나섰다. 끊김 없이 고품질 통화가 가능해 주위를 놀라게 했다.
한발 더 나아가 한국이동통신은 같은 해 10월 9일 서울 장안동 사옥에서 경상현 정보통신부 장관이 참석한 가운데 CDMA 방식 시험통화에도 성공했다.
성공리에 시연을 마무리한 서 대표는 거침없이 의견을 개진했다. PCS 기술표준으로 CDMA 방식을 채택하는 것이 국민의 이익에 부합한다고 주장했다. 1995년 10월 20일 정보통신부는 마침내 PCS 기술표준을 확정했다. 정통부는 통신사업자 허가 관련 전자공청회에 앞서 ‘통신사업자 허가신청요령 2차 시안'을 발표했다. 경제성과 기술확보 측면에서 PCS 무선접속방식을 TDMA가 아닌 CDMA로 가겠다고 천명했다.
CDMA 세계 최초 상용화
1995년 크리스마스를 앞둔 어느 날. 한국이동통신 직원들은 인천과 부천을 오고 가며 부산하게 움직였다. 직원들이 직접 상용화 초기 지역을 돌아다니며 CDMA 시험통화를 시도했다. 결과는 만족스러웠다. 이에 힘입어 한국이동통신은 대대적인 마케팅 작업에 착수했다.
CDMA 상용화 하루 전인 1995년 12월 31일 한국이동통신은 마지막 최종 시험통화를 실시했다. 시험통화는 손길승 SK그룹 부회장과 서정욱 한국이동통신 사장 등이 참석했다.
인천 톨게이트에서 차량에 탑승한 손길승 부회장은 인천 주안역(1호선)까지 이동하면서 최종현 SK그룹 회장에게 전화(CDMA 방식)를 걸어 상황을 보고 했다. 이때 역시도 단말기를 번갈아가며 쓰는 동안 단 한차례도 끊기지 않고 명료한 통화품질을 보여줬다.
1996년 1월 1일. 한국이동통신은 인천과 부천 지역에서 CDMA 방식의 디지털 이동전화 서비스를 세계 최초로 상용화했다. 아날로그와 CDMA 듀얼방식으로 CDMA 가입자는 CDMA 커버리지와 상관없이 전국에서 이동전화 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었다.
다만, 1월 1일이 신정 연휴인 관계로 1호 가입자는 휴일을 넘긴 1월 3일 탄생했다. 3일 오전 9시 1분 남인천영업소에 방문한 자영업자 정은섭 씨는 가입신청서를 제출하고 CDMA 1호 가입자라는 영예를 얻었다. CDMA 디지털 이동전화 서비스를 이용하기 위해 몇 달을 기다렸다는 정 씨는 깨끗한 통화 감도에 감탄했다며 언론사들의 인터뷰에 응했다.
성공적인 CDMA 상용화를 마무리한 한국이동통신은 1996년 3월 28일 세계 최초 CDMA 이동전화 상용화 성공 기념행사를 개최했다. 서울 힐튼호텔에서 개최한 이 행사는 최종현 SK그룹 회장뿐만 아니라 이수성 국무총리, 이석채 정보통신부 장관, 내외 귀빈과 법인, 우수고객 등 1천여 명이 참석했다.
이 자리에서 손길승 부회장은 인사말을 통해 “CDMA 방식 디지털 이동전화 서비스의 상용화 성공을 계기로 향후 한국이동통신은 차세대 통신 서비스와 멀티미디어 세계를 선도해 나가겠다”라고 말했다.
서정욱, 다시 또 한번
“미지의 세계에 도전하는 어려운 연구에 몰두해 온 젊은 과학자들에게 영광을 돌리며, 세계에서 처음으로 CDMA 방식 이동전화 서비스를 본격적으로 시작한 것은 이동통신 기술과 서비스의 광복이나 마찬가지다.”
CDMA 최초 상용화를 사선에서 진두지휘했던 서정욱 한국이동통신 사장은 같은 해 4월 8일 금탑산업훈장을 수훈하면서 이같이 말했다.
서정욱 장관의 이같은 추진력은 이미 업계에서 정평이 나 있었다. 서울대 공과대학 전기공학과를 거쳐 미국 텍사스 A&M 대학원 전기공학 박사를 취득한 후 공군사관학교 교수를 역임한 후 국방과학연구소장을 지내고, 한국과학기술연구원장과 과학기술부 차관, 한국통신 부사장 등 다채로운 이력을 갖췄다. 전전자교환기(TDX) 국산화에 일조하기도 했다.
업계에서는 그를 방대한 독서량을 가진 공학박사 또는 지독한 워커홀릭 등으로 평하기도 할 만큼 일처리에 있어 실제적 완벽을 기했던 인물이기도 하다.
한편, 기념행사 이후 한국이동통신은 4월 12일 서울 수도권으로 CDMA 커버리지를 확대했으며, 4월 23일 가입자 1만 명을 돌파했다. 단말 수량이 부족할 정도로 폭발적인 가입자를 감내해야 했다. 식별번호인 011을 활용한 ‘디지털 011’ 브랜드는 1997년 속도를 보다 강조한 ‘스피드 011’로 전환되면서 고객의 대표적 상징으로 기록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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