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체와 달리 만만찮은 ‘LCD-OLED 치킨게임’…묘수 찾기 활발
[디지털데일리 신현석기자] LCD(액정표시장치) 분야에서 중국이 대규모 물량을 쏟아내면서 한국을 몰아붙이고 있다. 이른바 ‘LCD 치킨게임’이다.
중국은 LCD뿐 아니라 OLED(유기발광다이오드) 분야에서도 한국 인력 영입을 적극적으로 추진하고 있다. 아직 중국의 OLED 기술력이 미흡하다는 평가가 많지만 결국 OLED도 치킨게임으로 치달을 가능성이 커 보인다. 손해를 불사한 게임이지만 중국은 한국보다 더 유리하다고 볼 수 있다. 중국 정부가 보조금을 지급할 뿐 아니라 세계 최대 규모인 자국 시장에서 수요와 공급을 자체적으로 해결하면서 점유율을 높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미 한국은 반도체 치킨게임에서 승리한 역사가 있다. 그러나 이번에도 마냥 그때와 같을 것이란 생각은 안일한 접근일 수 있다. 반도체 치킨게임 당시와 현재 상황은 많은 차이가 있다. 무엇보다 지금 중국과의 치킨게임은 기업 대 기업의 경쟁이 아닌 중국 정부와 한국 기업의 대결로 보인다. 그만큼 중국과의 경쟁이 여러모로 ‘불공정 게임’에 가깝다는 말도 많다.
이 가운데 국내 디스플레이 업계에선 ‘묘수 찾기’ 움직임이 활발하다. 적극적으로 세트업체와 패널업체 간 협조 체제를 구축해야 한다는 주장부터 기업별로 LCD나 OLED 중 하나는 포기해야 한다는 조언까지 다양하다. 그만큼 중국 정부의 자국 산업 활성화 대책이 매섭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 디스플레이 치킨게임, 반도체와 뭐가 다른가 = 1980년대부터 30여 년간 이어진 반도체 치킨게임에서 살아남은 삼성전자, SK하이닉스, 마이크론 3강은 지금까지 반도체 호황의 단맛을 누려왔다.
삼성전자는 올해 2분기 디스플레이, 스마트폰 등 다른 사업의 부진에도 디램 가격 상승을 바탕으로 한 반도체 호황이 이를 상쇄해 선방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SK하이닉스는 올해 2분기 사상 최대인 5조원대의 영업이익을 기록할 것이란 전망이 나오고 있다. 마이크론은 최근까지도 세계 디램 시장에서 2위인 SK하이닉스를 바짝 추격하는 등 꾸준히 성장해왔다.
비록 반도체 호황이 수년 안에 끝날 것이란 주장이 계속 제기되고 있으나, 최소한 치킨게임에서 승리하면 업계의 과실을 일정 기간 누릴 수 있는 셈이다. 든든한 캐시카우를 마련함으로써 차기 사업 방향을 차분히 모색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이번에도 한국이 치킨게임에서 승리할 수 있을까. 명백한 점은 과거와 현재, 차이가 제법 분명하다는 점이다.
우선 반도체 치킨게임은 일본의 기술을 습득한 한국 기업이 자연스레 주도권을 넘겨받는 입장이었다면, 디스플레이 치킨게임에선 한국이 일본이나 독일처럼 쫓기는 처지가 된 모양새다.
더구나 중국은 자국 정부의 절대적인 지원을 등에 업고 출혈경쟁을 마다하지 않고 있다. 반도체 치킨게임과 달리 중국 사회주의 정부의 힘이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는 일종의 ‘불공정 게임’에 가깝다는 뜻이다.
또한 10년 전 반도체 치킨게임이 한창이던 당시 반도체 분야의 감가상각 비중이 현재 디스플레이 업계보다 높은 수준이었다는 점을 상기해야 한다는 주장도 나온다.
골든브릿지투자증권의 김장열 센터장은 9일 ‘LG디스플레이 투자보고서’를 통해 “하나 기억해 둘 사항은 반도체는 당시 감가상각비가 40% 수준이었으나, LG디스플레이의 올해 1분기 감가상각 비중은 16%로 재료비 등 변동비 비중이 훨씬 높다는 점”이라며 “디스플레이는 반도체보다 영업적자 진입 후 EBITDA(법인세, 이자, 감가상각비 차감 전 이익) 적자까지의 여유/갭이 작다는 것이고 업황이 급락하면 좀 더 빠르게 감산/투자 조정이 발생할 수밖에 없다”라고 설명했다.
10년 전 하이닉스반도체가 계속된 영업적자에도 일본과 치킨게임을 벌일 수 있었던 건 EBITDA단에서 여유가 있었기 때문으로 볼 수 있다는 분석이다. 달리 말하면 현재 디스플레이 치킨게임은 중국 정부의 지원 등 다른 요소를 차치하고서라도 10년 전보다 다소 불리한 점이 있다는 뜻이다.
◆ 중국 패널업체 도산?...꿈 같은 얘기일수도 = 2008년 4분기 하이닉스는 리먼브라더스 사태 등 금융위기 여파와 반도체 업황 악화로 영업적자 7820억원을 기록하고 주가도 폭락했다. 그러다 미국 서브프라임 모기지 여파와 반도체 공급 초과 등이 겹쳐 EBITDA가 마이너스가 되면서 결국 위기가 닥쳤다. 더 이상 여유를 부리기 쉽지 않게 된 것이다.
그런데 상황은 뜻밖의 전개로 쉽게 풀리기 시작했다. 2009년 1월 당시 디램 업계 5위였던 독일 키몬다가 파산을 신청하면서 상황이 급속도로 하이닉스에 유리하게 돌아간 것이다. 당시 키몬다 파산으로 하이닉스 주가는 2009년 1월 이후 1년 동안 4배 가량 올랐다. 이후 2012년 당시 시장 점유율 3~4위였던 일본 엘피다마저 파산신청을 하고 마이크론에 매각되면서 하이닉스 주가는 2012년 3분기부터 또다시 상승세를 탔다.
경쟁업체의 시장 탈락이 치킨게임의 중요한 변수가 될 수 있다는 관측이 나오는 이유다. 당시 디램 업계 5위 수준 점유율은 현재 LCD 업계에선 차이나스타(CSOT)와 비슷한 수준이다. 결국 차이나스타와 같은 경쟁 업체가 탈락하면 삼성디스플레이와 LG디스플레이에 큰 호재로 작용할 수 있다는 뜻이다.
그러나 중국 패널업체는 중국 정부의 절대적인 지원을 등에 업고 한국보다 훨씬 유리한 상황에서 치킨게임을 할 수 있다. 지방과 중앙 정부의 보조금 지원으로 LCD 가격 하락세가 완연한 가운데에서도 공격적으로 LCD 투자를 단행할 수 있다. 중국 최대 패널업체 BOE는 스스로 악화를 자초하면서 올해 주가가 반 토막이 났는데도 올해와 내년 LCD 투자를 계속 이어갈 계획이다.
이 때문에 지금의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선 어렵지만 용감한 선택을 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김장열 센터장은 “지금 미국은 금리 인상시기이며, 디스플레이 시장은 구조적 변환기로 반도체의 데이터센터 서버, SSD등과 같은 ‘킬러 어플리케이션’ 수요처가 확실하지 않다”라며 “반도체와 달리 BOE 등 만만치 않은 경쟁자 집단도 있다. 따라서, 지금은 최악의 경우를 상정하고 어렵지만 선제적인 전략적 선택과 그에 따른 조치가 이루어져야 한다”라고 조언했다.
그가 내놓은 대안책은 크게 두 가지다. LCD패널 생산을 축소해 가격 상승을 기대하거나, OLED 투자를 중단하고 LCD 출혈경쟁을 불사하는 것이다. 다만 1안은 LCD 가격 상승이 생각보다 저조할 수 있고, 2안은 투자자 우려를 불러와 주가 하락을 더 부추길 수 있다. 손해를 감수하고서라도 LG디스플레이가 전략적인 양자택일을 해야만 하는 기로에 서 있다는 주장이다.
그나마 중소형 OLED 매출이 70% 정도인 삼성디스플레이는 상황이 낫지만 LCD 매출 비중이 90%에 달하는 LG디스플레이는 사면초가 상황에 빠졌다. LG디스플레이로선 OLED 투자가 시급한 상황이지만 플렉시블 OLED 투자가 부담으로 작용할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미 플렉시블 OLED 시장에서 97% 이상의 점유율을 확보한 삼성디스플레이를 앞서기는 늦었다는 분석이다.
이 가운데 상황이 어려운 LG디스플레이가 삼성전자, LG전자와 같은 국내 세트업체와 힘을 합쳐 대응해야 한다는 주장도 나온다. 물론 자유시장 경제 하에서 경쟁사들이 힘을 합치는 것은 어려운 주문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 긴박한 상황을 고려해 암묵적인 공조를 펼쳐야 한다는 주장이다.
하이투자증권의 정원석 연구원은 디스플레이 산업 보고서를 통해 “LG디스플레이로선 중대형 LCD 업황 부진으로 LG디스플레이의 실적 하락이 예상돼 재무 지표 악화는 불가피하겠지만 향후 부활을 위해 투자는 반드시 필요한 상황”이라며 “향후 OLED TV 시장 규모를 확대하며 LCD 진영의 중국 업체들을 견제하기 위해서는 OLED 산업 전반이 규모의 경제에 진입해 원가 경쟁력을 갖출 수 있도록 국내 업체들의 협력이 필요하다”라고 조언했다.
이 가운데 한국 정부의 대응이 아쉽다는 지적도 많다. 산업통상자원부, 기획재정부 등 정부 부처가 미중 무역전쟁에 대해 합일된 방향성을 갖추지 못했다는 비판도 나온다.
한편 중국 법원이 마이크론의 중국 내 생산 및 판매를 가로막는 예비 판결을 내림으로써 반도체 분야에서도 치킨게임이 벌어질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되고 있다. 아직 중국 메모리반도체 업체 경쟁력이 미미해 전혀 위협이 안 된다는 주장도 있지만, 마이크론 사태가 중국 반도체 굴기의 새로운 발화점이 될 가능성을 되짚어봐야 한다는 시각도 많다.
중국은 현재 삼성전자, SK하이닉스, 마이크론의 담합 여부를 조사하고 있다. 중국이 디스플레이에 이어 반도체 시장에도 눈독을 들이고 있는 가운데 한국이 어떤 대응법을 마련할지 주목되는 시점이다.
<신현석 기자>shs11@ddail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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